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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염장3형제’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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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0. 06. 24. 07:30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21)
양승진 기자] 좀 지난 일이지만 군대있을 때 얘기를 해 볼까 한다.

나는 1992년 군에 입대했다.

입대 후 5년 정도 복무 한 1996년 7월 '사로청 청년비서' 강습소에 6개월간 공부하러 가게 됐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청년비서가 돼 군부대에서 승급이 빠르고, 입당도 남보다 훨씬 유리했다.
거기다 제대를 하면 대학도 제일 좋은 학교로 추천받을 수 있어 모두 선망의 대상이다.

북한에서 청년이라면 누구나 이 학교를 가고 싶어 했지만 부대에서 한 명만 갈 수 있는 데 내가 가게 됐다.

그 때의 기쁜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최고였고, 하늘을 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학교에 가 보니 며칠도 안 돼 그 기쁜 마음이 싹 없어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어이없고 실망이 이만 저만 아니었다.

학교는 평양시 간리라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완전 산골짜기에 있고, 오전만 강습 받고 오후에는 모두 다 농사일에 투입됐다.

그래도 지도급에 있는 청년들이라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하는 눈치였다.

거기다 하루 세끼 식탁에는 '염장3형제'와 닭이 먹으면 영양가가 없어 알도 못 낳는다는 알람미 밥이 전부였다.

'염장3형제'는 무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낸 것과 소금에 염장한 것, 생채 낸 것 등 3가지를 말하는데 양념이나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아 아무런 맛이 없는 게 특징이다.

알람미 쌀도 너무 오래 묵어서인지 곰팡이 냄새가 났고, 국이래야 시래기 몇 쪼가리 둥둥 뜰뿐 기름 한 방울 없는 멀건 국물뿐이었다.

이렇게 먹으니 강습소에 온 청년들은 모두 비실비실했다.

일부에서는 "괜히 왔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먹는 것은 그렇다 치고 오후에 강냉이 밭에 비료를 주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호미도 하나 없었다.

손으로 인분(똥에 재를 버무린 비료)을 퍼서 한포기 한포기에 줬다.

청년들은 갖은 인상을 찌푸리며 시키는 대로 마지못해 꾸역꾸역 그 일을 했다.

단편적인 것이지만 세상 어디에 이렇게 농사짓는 데가 또 있을까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청년비서 강습소가 마치 실패한 사회주의를 대변하는 듯 했다.

더 가관인 것은 이렇게 학생들을 동원해 지은 강냉이를 가을에 수확하면 학생들에게 먹이는 게 아니라 간부들 집으로 실어갔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해서든 뭔가 축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들이다.

그래야 자기배도 채우고 또 그걸 위에다 바칠 수 있고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으니 말이다.

내가 군대서 겪은 일이니까 지금은 좀 나아졌겠지만 이것이 북한의 엄연한 실상이다.

내가 살던 청진에도 옥수수 밭이 많았다.

가을이 되면 옥수수 밭에 원두막이 한 두 개씩 만들어졌는데 훔쳐가지 못하게 하는 감시초소 역할이다.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훔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옥수수 알곡을 그냥 길에 놔둬도 가져가는 사람이 없을 만큼 비교적 괜찮게 산다.

어느 정도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니 북한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없어서 못 먹는 옥수수인데 중국은 모든 게 풍족해 보였다.

북한 땅에서 살려면 돈이 좀 있든지 아니면 고위직이나 간부급이 돼야 한다.

배불리 먹고 산다는 건 이들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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