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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삐라 보기만 해도 눈이 썩는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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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0. 06. 21. 07:29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⑱

양승진 기자] 나는 북한에 대해 말하면 지금도 섭섭하다.

오히려 분하고 원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려서부터 탈북하기 전까지 국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

정말 충성심 강했고, 남 보다 더 열성적으로 당원생활을 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다.

죽기를 각오하고 탈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나는 청진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엎고 아버지가 있는 강원도 평강으로 갔다.

2군단 군관으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간 것이다.

중대장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땐 비교적 잘 살았다.

5살 때 유치원에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당시 강원도 일대는 남한에서 보내는 삐라가 많았다.

자고 일어나면 떨어져 있어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이것에 대한 교육도 철저히 받았다.

보기만 해도 눈이 썩고, 만지면 손이 썩어 들어간다고 해 다들 겁냈다.

풍문으로도 눈이 썩고, 손이 썩은 사람까지 있었다는 소문탓에 삐라에 대한 공포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7살 때 군대에서 척추를 다쳐 제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잘 모르지만 다시 고향 청진으로 갔다.

아버지는 중대장 출신이라 직장은 2호관리소를 다녔다.

송이버섯으로 외화벌이를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각지에서 따온 송이를 잘 포장해서 외국에 수출하는 업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소학교에 들어가서는 모범학생이었고, 공부도 잘 해 학급반장을 했다.

중학교 때는 사로청 부위원장을 맡을 만큼 모범적인 학교생활을 했다.

원적(소풍)은 1년에 봄, 가을 두 번씩 갔는데 바다나 놀이공원 등으로 갔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남한의 어머니들이 아이들 학교에 다니며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 것처럼 우리 어머니도 그 당시엔 열성부모였다.

원적을 가면 선생님 도시락까지 싸갖고 따라다녔을 정도였다.

나에 대한 애정 때문이겠지만 어머니는 무척 열성적으로 해 모범학부형이었다.

당시 중층이상의 생활이 됐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활이 뒷받침 됐다.

군대에서도 나는 모범생활을 했다.

나는 당원이 되고나서 청년비서직을 수행했다.

군관들 속에 있었지만 많은 청년들의 입당 전 관리를 내가 맡았었다.

그만큼 비중 있는 직책과 업무를 수행했다.

군대 있을 때 하도 힘이 들어서 딱 한번 엉뚱한 짓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평양에서 갱도훈련이나 전시훈련 등 많은 훈련을 받았다.

훈련 받다 쇼크를 해 입원하는 군인들도 많았다.

배낭 20kg 짜리 지고 방독면에 소총까지 매면 여자 힘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여성이라고 봐주는 것도 없고 오히려 더 악랄하게 했다.

툭하면 비상소집이다 강행군이다 하다보면 몸이 성할 날이 없었다.

이러다 죽겠다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어느 날 맹장에 걸렸다는 핑계를 대고 한 3개월간 병원에 있은 적이 있다.

물론 의사와 사전에 짰다.

의사 아들이 지방에서 4군대 전사생활자로 입대를 했는데 의사가 좋은 자리로 보내달라고 해 신병훈련 승용차 양성소로 보내줬다.

간부들 운전만 하면 되니까 편한 군대생활이었다.

의사가 고맙다고 뭐가 필요하냐 해서 맹장 걸렸다 하고 3개월 누워있게 해달라고 말했다.
서로 필요한 것을 맞바꾼 셈이다.

이것 말고는 정말 국가에 헌신하며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가시며 나의 꿈이 산산조각 나고 그로인해 탈북까지 하게 됐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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