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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생일날 탈북 했다 잡혀 결국 북송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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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0. 06. 20. 07:29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⑰
양승진 기자] 중국에 있는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

아버지 사망확인서를 받기 위해 중국 땅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두렵고 공포스러웠다.

잡히면 죽는다는 불안감 속에서 꽁꽁 얼음이 언 두만강을 건넜다.

정확히 2005년 2월 16일 김정일 생일날이었다.
브로커에게 북한 돈 2만원을 주니 크게 불편함 없이 국경을 넘었다.

밤새 걸어 새벽 4시 무렵 중국의 용성이라는 개인집에 들어가 할머니 하고 통화를 했다.

할머니는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내가 있는 곳으로 왔다.

그 때가 아침 7시 정도였으니 할머니와 통화한지 3시간 만에 만났다.

할머니는 나를 보더니 붙들고 울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다 양수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가자며 내 손을 이끌었다.

할머니 집까지 가려면 변방대(국경수비대) 3군데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게 문제였다.

대비책도 없이 간다는 게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첫 번째는 그냥 통과됐다.

두 번째에서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다. 중국말로 묻는데 내가 대답하지 못하니까 할머니가 울고불고 했지만 나를 연행했다.

그곳에서 3일 정도 구금당하다 중국 공안에 넘겨졌다.

어디인지는 모르고 한 13일 정도 있다 나를 차에 싣고는 그대로 북송시켰다.

당시 북한에서는 탈북자 감시가 심했고, 다시 잡혀오면 그 대가를 치루 게 한다고 그냥두지 않았다.

나는 당원이라 다른 사람보다 중죄에 속했다.

무조건 교화소로 가야 할 판이었다.

어느 날 친척이 나서 이만저만 하다는 설명과 함께 돈으로 그 사람을 매수해 그나마 단련대로 배치됐다.

교화소 안 간 것만도 10년 감수했다.

단련대로 끌려간 나는 깡판에서 6개월간 개처럼 일만했다.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혹사당했다.

큰 브로크(블럭) 7장을 어깨에 매고 10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렸고, 당까(물건을 앞뒤로 드는 들것)에 시멘트 몰탈을 넣고 아파트 공사장을 누벼야 했다.

손에 허물과 구둔 살이 박히다 몇 번이나 벗겨지고 새로 낫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걸 견뎌내 참 다행이었다.

그 당시 어머니와 동생들이 하루 3번 면회를 왔다.

단련대는 면회를 시켜주는데 주된 이유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아침, 점심, 저녁을 맛난 것 싸다줘 그걸 먹고 버텼다.

만약 교화소에 갔다면 5-6년 면회도 안 시키고 통강냉이 먹고 일을 해야 하는데 버틸 수 없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교화소는 피부병도 많고 내가 몸이 약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끔찍하다.

단련소에서 나온 후 나는 몸을 추스렸다.

막상 집에 와 보니 모든 게 끝장이었다.

국가에 잘 보이겠다고 했던 군대생활 8년이나 대학생활, 판매원 생활 등이 수포로 돌아갔다.

나에게 남은 건 탈북하다 잡혀온 정치범이라는 것 밖에는 안 남았다.

북한 땅에서 살아갈 방법도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래저래 안 될 바엔 차라리 탈북을 하자 결심을 하고는 북한 땅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아버지 사망진단서가 정상적으로 처리됐다면 지금 내가 서울에 있지도 않고, 중국에서 애를 낳지도 않고, 탈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북한 땅을 떠나오면서 가슴에 묻었던 것이 있다.

'내가 나라를 버린 게 아니라 나라가 나를 배반한 것'이라고 말이다.

청진 집을 떠나오면서 나는 울면서 이 말을 되풀이 했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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