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녀 김 씨는 “함경북도 청진의 집을 나설 때 설령 어머니에게 얘기를 했다면 말렸을 것”이라며 “내가 집을 나온 후 아마도 중국에 갔을 것으로 믿고, 남한행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1975년 생으로 함경북도 청진이 고향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삼촌들은 중국에 머물며 이따금씩 왕래를 갖곤 했다.
직업군관인 아버지를 따라 남한과 대치상태에 있는 강원도 접경지역에 살 때는 중층이상의 생활을 누렸다. 소학교 시절 남한의 삐라를 직접 봤고 이때는 미제 앞잡이들 타도에 적개심으로 불타올랐을 만큼 체제에 순응한 생활을 했다.
1990년 중·후반 극심한 가뭄으로 촉발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어머니와 남동생은 나진으로 들어온 중국 물품을 팔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 나갔다. 소학교부터 고등중학교까지 11년간의 의무교육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8년간 복무했다.
군 생활은 출신성분이 비교적 괜찮아 평양에 있는 인민무력부에서 일했다.
당시 특무상사(사관장) 계급으로 장성급들을 상대하고, 주석궁을 들락거리며 책임자 역할을 하는 등 나름대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전역을 한 후 함경북도 유일의 3년짜리 대학인 경제전문학교를 졸업하고는 청진에서 지냈다.
당시에 군 출신으로 대접을 받았지만 월급은 없고 무조건 벌어서 국가에 헌납하는 형식이라 어머니와 남동생의 장사로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러던 생활이 아버지의 갑작스런 타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국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을 보고 오겠다던 아버지가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정상적인 통보를 받지 못한 보위부는 “남한으로 갔을 것”이라며 가족들을 괴롭혔다.
과거에는 탈북행이 발각되면 총살형이라는 극형을 했지만 그나마 중국서 사망한 것이 뒤늦게 확인돼 오해가 풀렸다.
하지만 남한사회의 문물이 물밀듯이 밀려오고 자유에 대한 염원을 안고 급기야 탈북을 결심했다.
김 씨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남한 CD를 가장 적게 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지목할 만큼 그래도 충성심이 강했었다”며 “탈북하기 전 천국의 계단, 남자의 향기, 가을동화, 올가미 등 드라마와 영화들을 봤다”고 말했다.
김 씨가 탈북하기 전 북한에서 본 영화로 인해 한국배우 중 권상우를 가장 멋진 남자로 꼽았다고 털어놨다.
북한 처녀들은 권상우를 대부분 알고 있고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이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친한 친구들과 CD를 돌려가며 봤기 때문에 탈북만 못했을 뿐이지 남한실정을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남한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는 보위부원들이 밤 12시가 넘으면 순찰을 멈추기 때문에 불을 끄고 문틈까지 틀어막은 채 밤새도록 보곤 했다고 말했다.
보위부원들이 가끔 순찰을 돌며 전깃줄에 검침하듯이 기계를 들이대 전기를 얼마나 쓰는 지하는 방법으로 적발하고, 만약 현장에서 잡히면 정치범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 때문에 도망가거나 돈으로 무마하는 등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한다고 들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