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해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모질게 마음먹었지만 애를 낳고 보니 참 난감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일이어서 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한국으로 가는 것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같이 청진에서부터 동행한 언니는 친황다오에 그냥 살겠다고 했다.
4살짜리 막내딸을 두만강에 떠내려 보낸 죄책감도 그렇고 이런 황망한 인생이 그곳에 가면 편하겠냐는 게 언니의 말이었다.
나도 딸아이를 놔두고 가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한족 브로커에게서 전화를 몇 번이나 받고 또 내가 걸었지만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어 결행을 미뤘다.
공안을 보기만 해도 오그라드는 처지에 무작정 따라나선다는 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정말 잘못했다간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처지여서 두 번 세 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탈북을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장춘에 있다고 연락을 해와 나는 친황다오로 오라고 요구했다.
전화상으로 잘못했다간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단단히 약속을 받지 않고는 나갈 수 없어 더 마음을 조렸다.
만나고 보니 그는 한국 사람이었다.
정확히 얘기하면 한국 주민등록증을 소지한 탈북자였다.
그는 한국까지 도착하게 해주겠다며 500만원을 요구했다.
수중에 돈이 없는 것을 안 브로커는 한국에 가서 하나원(북한 이탈주민들의 사회정착 지원을 위해 설치한 통일부 소속기관)을 나오면 정착금으로 정부에서 돈을 주는데 그걸 다시 주면 된다면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나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결행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제 막 태어난 딸아이 때문에 탈북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이게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 날 친황다오에서 버스를 타고 중국 국경까지 내달렸다.
중국-베트남-캄보디아 행은 철저히 브로커들이 분담해 자기지역을 커버하는 형국이었다.
베트남 멧남(하노이 외항)에서 강을 따라 이동하는 데 주로 밤에 움직였고, 혹시 모를 순찰에 대비해 배 밑창에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 베트남 브로커네집에 오후 4시에 도착해서는 일단 잠을 잤다.
새벽에 다시 버스를 타고 캄보디아 국경까지 가서 군대가 우리 일행을 받았다.
아마도 사전에 다 얘기가 된듯했다.
국경수비대 간부로 보이는 사람이 승용차에 태우더니 한참을 달려가자 한국대사관 정문 앞에 일행을 내려놓고는 부리나케 돌아갔다.
캄보디아 한국대사관 정문에서 불과 두 걸음 사이였다.
이로써 일단은 안도하게 됐다.
그동안 마음 졸인 것을 생각하면 평생 할 것을 불과 며칠 새 다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좀 마음이 놓이자 친황다오에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망 나와 미안하다. 나는 한국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딸애를 잘 키워 달라”고 말하자 “딸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제발 돌아오라”고 울면서 하소연 했다.
북한에선 어머니와 형제를 버리고, 중국에선 남편과 딸애를 버리고도 나는 한국을 택했다.
부모와 자식으로써 못할 짓이지만 언젠가는 빛을 발할 날이 있을 거란 마음으로 그것들을 대신했다.
뒷얘기지만 나는 하나원에서 퇴소하면서 정착금으로 300만원을 받았다.
일단 300만원을 주고 200만원은 벌어서 갚기로 했다.
하나원을 퇴소하면 6개월간 월 40만원의 생활비를 보태주는데 그걸 꼬박꼬박 모아 빚부터 청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