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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 끌려가느니 죽자” 쥐약 지닌 채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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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0. 06. 07. 07:30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⑥

양승진 기자] 탈북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가장 먼저 준비한 것이 쥐약이다.

만약 어디서든 잡혀 다시 끌려가느니 차라리 먹고 죽겠다는 각오로 청진에서부터 동행한 언니와 함께 준비했다.

그렇지만 쥐약을 사용할 만큼 급박한 일은 없었다.

두 번째로 또 준비한 것이 돈이었다.
나는 청진 집을 나서기 전 2만4000위안(408만원)을 자금으로 만들었다.

혹시 탈북할 때 북한이나 중국에서 일이 잘못되면 돈으로 어찌 해볼 요량으로 만든 돈이었다.

막상 집을 떠날 때는 내가 없어진걸 알면 고초를 당할 어머니 생각에 장사 밑천에 쓰라고 1만6000위안(272만원)을 편지와 함께 놓고 나왔다.

어머니에게 해 준게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가 쓴 편지는 이랬다.

우리 가정을 복권(재건)시키기 위해 돈 벌러 중국에 가겠다고 썼고, 나 때문에 겪을 부모 형제의 고초를 잘 알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보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에서는 중국에 간다고만 썼지 서울까지 간다는 말은 사실 쓰지 못했다.

나로서는 그게 어머니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없어진걸 알면 아마도 많은 시달림을 받았을 거라 짐작된다.

특히 당 출신이기 때문에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은 뻔하다.

처음엔 보위부원들이 집에 와 어디 갔냐고 추궁하면서 협박도 하고 끌려가 추문을 당했을 수도 있다.
 
당시엔 탈북자가 발생하면 추방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어머니와 두 남동생의 소식은 모르고 있다.

브로커를 통하면 되겠지만 내 수중에 아직 그만한 돈이 없어 연락조차 할 길이 없다.

탈북자가 많아지면서 지금은 많이 누그러들었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그마져도 믿을 수가 없다.

탈북 당시 국경주변인 회룡이나 온성, 무산 등에는 빈 집이 많았다.

주민들이 도망 나오니까 빈집만 늘어 유령도시를 방불케 했다.

북한 주민들이 몰래 남한에 관한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머리도 트고 눈도 트이니까 자유스럽게 살려는 이유 때문이다.

북한에 비하면 자유민주주의가 편하고 좋다는 것을 다 알게 됐다.

사회적 분위기가 가만히 있어도 들려오는 것 때문에 그쪽으로 더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뻔한 이치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에 관해서도 특별히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통일이 된다는 것을 다 안다.

뭔가 계기가 되면 포신이든 총이든 혁명의 수뇌부 쪽으로 그것을 돌릴 것이다.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주민들 입 막고 탄압하는 게 지긋지긋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수뇌부가 무너지고 북한에도 자유의 바람이 불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집은 원래 괜찮은 집안이었다.

직업군인(특수부대)인 아버지와 친인척들이 보위부, 안전부, 조종사 등으로 있어 험한 꼴은 당하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가시고 난 후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고, 동생한테 배가 한 척 있었는데 당국에 몰 수 당한 것을 알고도 탈북했다.

규칙을 어기면서 배를 운항해 고기를 잡았다는 게 몰수의 원인이다.

그게 얼마나 잘못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집안이 무너지니까 주변에서 막 대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서울에서 나는 맛난 것 먹고 살지만 어머니 안부도 모르는 처지가 됐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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