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나는 부모 버리고 8개월 된 딸도 버렸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371368

글자크기

닫기

양승진 기자

승인 : 2010. 06. 23. 07:31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20)

양승진 기자] 옛말에 남편의 죽음은 앞산이 보이지만 자식의 죽음은 앞산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뜻을 겪어 봤다.

북한 땅에서 처녀로 탈북한 나는 중국에서 신랑을 만나 같이 산지 1년6개월쯤 됐을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낳았다.

서울로 가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때라 임신과 출산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사실 낳고 싶지 않은 딸이지만 당시엔 중국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그게 내 가슴 아픈 운명이다.

나는 아이가 8개월 됐을 때 또다시 집을 뛰쳐나왔다.

서울로 가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소리 없이 울었다.

그리고는 대문을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발걸음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다시는 못갈 것 같은 생각에 더 꿋꿋하게 발을 내디뎠다.

눈물이 앞을 가려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새벽길을 하염 없이 걸었다.

내가 북한 땅을 버리고 중국으로 갈 때보다 더 가슴이 미어졌다.

탈북 당시엔 북한이 싫어 무조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지금은 서울로 가자고 나선 길에 아이가 자꾸 눈에 밟혔다.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데, 쫒길 일이 하나도 없는데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탈북한 내 운명도 그렇지만 아이를 떼어 놓고 와야 했던 그 결정이 지금도 너무나 가슴 아프다.

서울에 와 살고 있는 지금 단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걸 보면 운명의 장난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다.

신랑을 만난 것도 그렇고, 중국에서의 가정생활도 그리 평탄치 못했다.

신랑과 말이 통하지 않아 한동안 시련을 겪고, 해보지 않은 농사일을 한 것은 그렇다 쳐도 늘 공안에 쫒기는 신세여서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러다 나를 엄마라고 불러줄 귀하고 귀한 딸을 낳았다.

하지만 그 아이마저 뒤로하고 한국으로 온 엄마는 죄를 짓고 말았다.

한국에 와 잘 꾸며진 아파트 단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마치 상처 위에 소금을 뿌린 듯한 심정이라면 믿을까.

지금 커가고 있는 아이가 중국 시골에서 뛰어 놀아봤자 흙장난일 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지도 의문이다.

아직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아이를 생각하면 이 모든 게 내가 북한 땅에서 태어난 것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부모와 생이별한 것도 모자라 아기와 생이별 하는 비극까지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 인생에 바라는 것이 얼마나 큰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저 행복해봤으면” 이것뿐이다.

부모님 축복 속에서 여자가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애를 낳아 키우는 그런 것이 행복인데 나는 그 소박한 것마저도 이젠 이룰 수 없다.

내가 이러니 북한 여자들에게 그런 행복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오직 북한에서 태어난 죄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일상이 이어지는 셈이다.
양승진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