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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돈 줘도 싫다는 놈 처음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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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0. 06. 18. 07:30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⑯

양승진 기자] 나는 북한에서 출세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군복무를 8년이나 했고,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공부하는 등 나름대로 기반을 구축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중국에서 돌아가시고 나면서부터 모든 것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정상적으로 중국에서 돌아가신 게 확인만 됐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아버지 문제는 집안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기에 나는 여기에만 매달렸다.

내 앞길과 관련돼 있으니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주민등록 과장한테 찾아가 "돈을 줄 테니 아버지를 얼어 죽은 행방불명자로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 과장은 "만약에 아버지가 돌아오면 내 목이 달아나게 된다"며 해줄 수 없다고 했다.
며칠 있다가 또다시 찾아갔다.

"무슨 방도가 없겠냐"며 돈을 좀 찔러줬더니 되레 "가까운 친척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양강도 백암에 이모가 있다"고 하자 과장은 "그럼 아버지가 거기서 죽은 것으로 하고 위조확인증을 해 오면 내가 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양강도 백암으로 갔다.

그곳은 산골 중의 산골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백암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은 통나무를 가득 실은 전기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돈을 좀 주고는 생소나무를 실은 화물차 위에 올랐다.

그 때가 밤 11시여서 칠흑같이 어두웠다.

밑에는 소나무 송진 때문에 찐득하니 고역이었고, 그렇다고 고개를 들면 고압전기에 눌러 붙을 판이어서 도착할 때까지 꼼짝 없이 누워서 가야했다.

나와 전기선까지 거리는 50-60cm여서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다.

피곤했던지 어느 순간 내가 깜빡하고 잠이 들었다.

한참 지났을까 나는 무의식중에 일어나려고 고개를 드는 순간 누가 내 머리를 힘껏 눌렀다.

내 옆에 타고 있던 소위 군관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눌러준 것이었다.

만약 그 군관이 없었다면 나는 그 자리에서 고압전기에 그대로 붙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한참 후에 그 군관은 "나도 무척 졸리지만 만약 자다가 무의식중에 일어나면 죽을 것 같아 참았다"면서 "내가 안 잤으니까 당신이 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뻘 되는 그 군관한테 정말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럭저럭 백암 연사까지 갔다.

그곳에서 안전부 부장을 만났다.

내가 이런 저런 일로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좀 도와달라며 북한 돈 100만원을 내놓았다.

그 부장은 "100만원 아니라 억만금을 줘도 못한다. 내가 시신을 보지 못했는데 잘못하면 내 목이 달아나니 절대로 해줄수 없다"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그 때 돈을 줘도 싫다는 놈을 북한에서 처음 만났다.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청진으로 돌아왔다.

또다시 주민등록 과장을 찾아갔다.

"백암에 간일은 실패했다"고 전하고는 "다른 방법이 없겠냐"고 다시한번 애원했다.

그 과장은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좀 위험하다"면서 "중국에 있는 할머니에게 가서 사망확인서를 해 와라. 그 외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중국으로 가기로 하고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어머니는 "잘 갔다 오라"며 내 손을 잡고 눈물만 흘렸다.

중국으로 가 일을 원만하게 처리하는 게 나와 우리 집안을 살리는 길이어서 어쩔 수 없이 길을 나섰다.

지금도 그 날을 잊지 못한다.

정확히 2005년 2월 16일 김정일 생일날 얼음 위로 두만강을 건넜다.

내가 탈북 할 수밖에 없는 일이 그 때 중국에서 벌어졌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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