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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간들이 장군님이 아끼는 병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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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0. 06. 28. 07:29

어느 탈북여성의 눈물고백 수기-(24)
양승진 기자] 우리 집안 얘기를 다시 이어갈까한다.

동생의 생활제대와 관련해 엄마한테서 온 편지를 바탕으로 나는 보름간 고민을 했다.

뭔가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나도 무척 힘들었다.

당장 총참모장의 결제가 떨어지면 영락없이 생활제대를 해야 하는 판이라 조급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나는 동생을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한번 부딪혀 보자" 하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내가 당원이니까 일단 직속상관인 당비서(정치부장)에게 보고를 했다.

편지를 보여주고는 협조를 부탁했다.

그리고 나는 "내 동생일 처리도 못하는 데 내가 사로청년 50명을 잘 이끌 수 없다" 하고는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러자 당비서는 간부를 소개시켜주는 등 많은 도움을 줬다.

동생 일을 제대로 하려면 총정치국 신소과장(군부대 일처리)을 만나야 하는데 밑에 있는 부관들이 훼방을 놓거나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새벽마다 무력부 청사(평양시 서성구역 긴재동) 간부 사택에 가서 5시부터 기다렸다.

어느 날 출근하기 위해 차를 타고 나오는 신소과장 차를 막아섰다.

신소과장이 "누구냐, 왜 차를 막느냐" 하기에 나는 "이런 사정으로 왔다"하며 그 동안의 일을 다 얘기했다.

그러고는 "집안이라고 편들려고 온 것 아니다. 최고사령관 동지께서 군민관계 가지고 심려하시는데 부대 중간들이 한 전사네 집에 가서 그 돈궤를 훔쳐 달아나는 것이 옳은 거냐. 잘 알아보시고 옳은 처벌을 내려달라"고 했다.

나는 또 "이런 인간들이 장군님이 아끼는 병사냐. 이번 일을 올바르게 처리해 장군님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한편으로는 "만약 과장동지가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중앙당에 보고하겠다. 그러면 과장동지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잘 처리해 달라"고 설득했다.

새벽 출근길에 만난 하전사가 단호하게 얘기하자 어안이 벙벙한 신소과장은 "어떻게 하전사가 직접 중앙당에 보고 하냐"면서 웃었다.

나는 "하전사라 우습게 보지마라. 모든 일은 약한 곳에서 터지는 거다. 나는 능히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소과장은 내 말을 끝까지 다 듣고는 웃으면서 "알았다. 내가 다 알아보겠다"고 약속해 나 또한 길을 비켜줬다.

동생의 생활제대 건은 내가 신소과장을 만난 지 정확히 3개월 만에 완전히 결말이 났다.

신소과장이 엄마와 동생을 평양으로 직접 불러 구체적인 얘기를 다 들었다.

또 교도대 지도국(덕천)에 검열을 보내 알아보니 모든 게 사실로 밝혀졌다.

내 동생 군복을 벗기겠다던 그 두 사람은 본인들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동생 또한 그런 일이 있었다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새로 입대한 것으로 해서 평양으로 끌어올렸다.

이번엔 특수부대가 아니라 대렬보충국 승용차양성소에서 강습을 마치고 그곳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하게 됐다.

동생의 일을 원만히 처리하게 돼 나는 얼마 만에 안도했는지 모른다.

내 직속상관인 정치비서나 신소과장 등은 참으로 고마웠다.

그로인해 나는 더 열렬한 전사로 다시 태어났고 우리 집안도 바르게 세울 수 있었다.

당시 그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면 어쩌면 탈북이 더 빨랐을지도 모르겠다.

생활제대로 인해 맘고생이 심했을 동생은 지금 어디서 무었을 하는지, 북녘 땅에서 잘 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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