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일본)/아시아투데이 조은주·정지희 기자 = 일본 사회가 변하고 있다. 4월 시작되는 '정년 65세 연장 의무화' 제도를 계기로 고령화 사회, 고령자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정년 65세 연장 의무화'란 정부가 후생 연금의 지급 개시 연령을 65세로 끌어올리면서 60세 정년 퇴직자에게는 5년이라는 공백이 생겼고 기업이 이들 가운데 근로를 희망하는 자에게 65세까지 재고용을 의무화한 제도다.
이 법이 시행되기까지는 일본 베이비부머(단카이 세대, 1947~1949년생)의 역할이 가장 컸다.
단카이 세대가 정년을 맞이한 2007년 대량 퇴직으로 사회보장제도를 둘러싼 세대 간 갈등, 전문 인력 감소 등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를 것이란 우려가 터져 나왔고 이에 정부는 발 빠르게 기업들의 정년과 연금 등 구조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2007년 문제'로 일본 사회는 고령화가 자신들에게 닥친 현실임을 직시하고 정년퇴직 연장, 은퇴 연구, 노후 계획 등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일본이 세계 최초의 초고령사회가 된 점을 기업, 개개인 모두가 받아들이고, 공감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고 있다. 특히 중장년층, 고령자를 위한 사단법인, 단체 등이 이를 위한 선봉장에 나서고 있다.
◇ 은퇴 계획,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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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연령자고용복지협회의 모치즈키 마모루 회장이 지난주 도쿄 신바시의 사무실에서 자신이 개발한 생애설계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조은주 |
"베이비부머라는 특정 세대와 상관없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재취업, 창업 등 최근 한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한국 베이비부머(1955년~1963년생)들의 노후 준비에 대해 중고연령자고용복지협회(Japan Association of Development for the Aged, 이하 JADA)의 모치즈키 마모루 회장은 이렇게 조언한다.
"노후를 준비한다는 건 인생 전체를 설계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미 40~50대가 된 후라면 좀 늦는다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그는 강조한다.
JADA가 설립된 건 지난 1973년. 고도성장을 거듭하던 일본 경제가 저성장으로 돌아서던 시기다. 여기에 오일쇼크까지 겹치면서 40-50대 중장년층이 일자리에서 내몰리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모치즈키 회장은 중고령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 여기에 중고령자의 노후 대책을 지원할 단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전했다. "인간의 수명이 늘기만 했지, 퇴직 이후의 삶, 즉 제2의 인생에 대한 설계나 지식은 전무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그가 개발한 게 바로 생애설계프로그램인 PREP(Pre & Post Retirement Education and Life Planning Programs)이다. 직업 교육, 취업에만 집중하는 일반적인 경력 개발 프로그램이 아니라 직업을 통해 건강, 가족과의 관계, 자존감 등 삶의 의미를 제대로 설계하자는 취지다.
모치즈키 회장은 이에 대해 “경제, 건강, 커리어(경력)라는 삼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인생이 즐거운 법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의 수명이 100세 아니 1000세가 되어도 행복하기 어려운 거죠”라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인생 플랜은 PREP 같은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더라도 꼭 필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1년에 단 하루라도 좋습니다. 신중하게 자신의 라이프 플랜을 세워보세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 "65세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
"최근 한국 베이비부머들이 은퇴시장에 본격 나오면서 이들에 대한 재취업이나 고령화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던데 고령자를 칭하는 기준인 ‘65세’가 언제 정해졌는지 아시나요?"
지난주 도쿄 요요기 사무실을 방문한 기자에게 아베 유우코 일본 웰에이징(WELL-aging)협회 회장(사진)은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진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른바 ‘65세=고령자’라는 공식은 1953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것이다.
“당시 65세가 평균 수명이었기 때문에 이를 넘으면 오래 사는 사람, 즉 고령자라고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등 5개 WHO 이사국이 정한 거죠. 근데 지금 인간의 평균 수명은 80세를 훌쩍 넘었고 60세가 정년이라면 남은 20년은 어떻게 살아가라는 걸까요?.”
그는 지금 세대는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를 살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중심에는 베이비부머가 있습니다. 각 나라의 경제 성장을 주도한 세력으로 부동산, 기업,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이 이들의 성장에 의해 변화해 간 거죠.
일본 정부는 그동안 고령화에 대비해 갖가지 대책을 마련해왔습니다. 1960년대 이전에는 정년연장에 대해 노사의 자주적인 노력을 촉구했고 1972년부터 정부대책으로 정년연장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정년 60세를 의무화한 건 지난 1994년의 일이고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령화, 정년퇴직, 은퇴 이후 삶 등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죠. 그리고 단카이 세대라는 베이비부머의 대량 퇴직 우려가 2007년 대두되면서 사회 전체가 이를 심각한 문제, 자신들의 문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일본 웰에이징협회의 활동 폭이 넓어진 건 이때부터다. 이전까지는 고령자들을 대상으로 고령화에 대한 계몽운동을 해왔지만 2007년부터는 젊은 층에게 앞으로의 삶, 노후 계획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갖가지 체험 행사를 펼치고 있다.
특히 인스턴트 시니어라는 시니어 체험 행사를 각 학교나 단체를 돌며 실시하고 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다. 인스턴트 시니어는 캐나다 정부의 후원을 받는 행사로 각종 도구를 몸소 착용해 실제 고령자가 되어보는 것이다.
고령자가 됐을 때 일상생활에서 어떤 경우 가장 불편한 지, 어떤 물건이 적합한지를 알 수 있다는 게 아베 회장의 설명이다.
수많은 업체들의 감사 편지를 받았어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일본 버스는 계단이 없지요? 한 버스업체 사원들이 인스턴트 시니어 교육을 받은 뒤 바꾸자는 운동을 시작했고, 다른 업체들도 이를 실천해 나갔답니다. 고령화 시대에 사는 우리들, 이제는 이러한 공감대 형성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
◇ "한국, 시행착오 겪지 말아야"
정부 및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아 중장년층의 지역 커뮤니티나 카페 개설을 지원하고 있는 장수사회문화협회(WAC)의 핫토리 마리코 이사장(사진)도 이 같은 취지에 동감한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고령화 문제라는 건 단순히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인류 전체의 문제다.
"개개인은 국가에 적극적인 대책 마련을 원하지만 정부 차원의 대책은 이미 한발 늦은 후에야 나오죠. 바로 대책을 직접 만드는 현역들은 고령화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들이기 때문인 겁니다."
따라서 개인이나 민간단체부터 이를 직시하고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하다고 핫토리 이사장은 강조했다.
협회의 최근 활동도 이 같은 핫토리 이사장의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국을 돌며 인지증(치매) 인식 교육, 개호 예방 세미나 등을 고아나 결손가정 어린이들을 위탁, 지원해주는 사업도 전개하고 있다.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로는 후쿠시마 현민과 아동들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우리 나이를 먹으면 고령자가 된다는 인식, 인생 설계를 해야 한다는 인식 등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해야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또 한국의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제일 빠르다고 지적하면서 "일본의 제도와 대책 등을 잘 검토해서 시행착오를 겪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