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번째 태극전사’들은 비록 경기엔 졌지만 지난 그리스전에서의 첫 승리와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을 돼시기며 경기가 종료되도 거리를 떠날 줄 모르며 밤을 지새웠다.
◇전국 곳곳서 우중응원…맨몸으로 비 맞기도 = 경기를 몇시간 앞두고 비가 내린 가운데 전국 곳곳의 광장이나 축구장 등에 모인 시민 91만여명은 불편을 감수하고 갖가지 방식을 동원해 비를 피하며 열띤 응원을 펼쳤다.
대표적인 거리응원 장소인 서울광장에서는 오후 9시30분께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갑자기 장대비로 변하자 수만 명의 응원단이 일제히 우산을 펼치거나 우비를 입는 등 인상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들 대다수는 우비를 입거나 준비한 우산으로 비를 피했지만 아예 비를 맞기로 작정하고 경기 내내 윗옷을 벗고 응원하는 시민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일부는 쓰레기봉지나 기업에서 나눠준 플래카드로 급하게 우의나 모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신촌·대학로 “선수들 참 잘해줬어요”=시민들은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붉은색 티셔츠 차림을 한 채 응원전이 열리는 신촌과 대학로 곳곳으로 경기 시작 전부터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아공월드컵 16강에 진출한 대한민국과 우루과이와의 축구경기를 응원하러 온 시민들로 신촌과 대학로 곳곳의 술집과 음식점은 북새통을 이뤘다.
전반 7분 우루과이 선수가 선제골을 골을 넣자 아쉬움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지만 시민들은 대한민국 선수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응원을 멈추지 않았다.
후반 20분 이청용 선수가 동점골을 터트리자 시민들의 환호 소리가 곳곳에 울러 퍼졌다.
대학생 신정민(25)씨는 “와~대단하다. 이청용 선수 멋져요~”라며 한국 선수들을 응원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김중연(30)씨도 “대한민국 선수 파이팅~! 골 넣을 줄 알았다”며 기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전반전과 후반전 내내 한국 축구대표팀이 좋은 기회를 많이 만들었지만 이를 골로 연결시키지 못해 2-1로 패하며 8강 진출에 실패하자 시민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이내 선수들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며 오히려 선수들을 격려했다.
친구 2명과 함께 클럽을 찾은 대학생 이진석(20·여)씨는 “우리나라가 이겼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16강 진출만으로도 만족한다. 선수들이 끝까지 열심히 뛰어줘서 고맙다. 다음엔 더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 직후 열광과 흥분에 빠져 있던 시민들은 ‘친환경 응원’의 모습도 보여줬다.
이들은 다 함께 “청소, 청소”를 연호하며 붉은 악마가 나눠준 붉은색 비닐봉지에 쓰레기를 담아 버리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발휘했다.
△목발짚고 텐트치고 = 서울 한강반포지구 플로팅아일랜드에서는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형형색색의 우비를 입은 시민들로 가득 차있었다.
비가 점점 더 쏟아지자 일부 시민은 자리를 뜨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자리를 지키며 응원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한 초등학생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경기를 관전하러 오기도 했다.
인근 아파트에 거주하는 신소연(13)양은 “다리도 아프고 비도 오지만 축구를 워낙 좋아해 응원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쏟아지는 비에 파라솔을 들고 온 시민이 있는가 하면 아예 텐트를 치고 경기를 관전하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청소년들 탈선의 장 = 일부 청소년들은 거리응원에 나와 담배를 피우고 맥주를 마시는 등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은 거리 응원을 경기 관전이 아닌 일탈의 도구를 이용하는 듯 보였다.
인근 학교에 다니는 신모군(15)은 “집에 있기도 싫고 응원을 핑계 삼아 친구들과 만나 즐기려 나왔다”며 “어차피 담배를 피우건 술을 마시건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하나가 된 아파트촌 = “졌지만 정말 재미있는 경기였어요. 심장이 터질 듯 했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봤어요”
전국의 아파트 촌이 환하게 불을 밝힌 채 8강을 향한 응원의 열기는 뜨거웠다.
비가 내리는 밤이라 가족끼리 오붓하게 경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들의 응원의 목소리는 어느새 하나가 됐다.
8살짜리 아들을 둔 김재호씨(35·서울시 마포구)는 “아들이 경기를 보는 순간순간 자신과 이웃들이 같은 반응을 보이자 ‘하나가 된 것 같아 즐겁다’고 말했다. 열심히 싸워준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고 말했다.
경기가 끝나자 서대문의 한 맥주집에는 우루과이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졌음을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여의도에 사는 박진수씨(38)는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오늘처럼 열심히 뛴 경기가 없었던 것 같다. 승리의 여신이 우리에게 손을 들어주지 않아서 아쉬울 뿐이다”며 “우리나라가 졌다는 것이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앞으로 무슨 낙으로 사나 고민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