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투데이 이정필 기자 = ‘노인들의 천국’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4일 오전 10시,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매서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이들은 딱히 무엇을 한다기보다 쌓인 눈을 피해 길이 난 양지에 서서 볕을 쬐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추운데 왜 밖에 나오셨냐’는 질문에 대부분은 “가족들 눈치가 보이고 할 일도 없는데 이곳에 오면 동년배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식사도 할 수 있어 운동 삼아 자주 온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아직 건강하고 일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은퇴 후 노년의 삶을 그저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점심때가 가까워질수록 공원 안팎엔 노인들이 눈에 띄게 많아진다.
공원 뒤편 골목길에는 ‘해장국 2000원, 우동 1000원, 막걸리 1500원’ 등을 써놓은 가게들이 즐비하다.
술 한 컵에 1000원씩 받거나 ‘식사와 술 2900원’으로 100원이 할인된 세트메뉴를 내건 곳도 있다.
‘이발 3500원’이라고 걸린 이발소 앞 자판기에는 100원짜리 커피를 뽑아 마시는 노인들이 보인다.
골목길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원각사 무료급식소 앞에 노인들이 길게 줄을 서있다.
이들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서로 반갑게 악수를 하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원각사는 지난 1993년부터 노인들을 위해 무료급식을 해왔는데 현재 하루에 적게는 150명에서 많게는 300명의 노인들이 이곳에 찾아와 점심식사를 하고 간다.
주지스님과 자원봉사자 10여명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에게 따듯한 밥과 국물을 대접한다고 한다. 허울 뿐인 정부 정책보다 이들의 희생 정신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한 국밥집에 들어가봤다. 한창 점심식사 중인 노인들로 가득하다.
기자와 주인아주머니를 제외하면 전부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들이다.
두 세 명이 같이 오기도 하지만 혼자 와서 합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선지해장국에 밥 한 공기를 말고 유일한 반찬인 김치와 먹으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꽁꽁 얼었던 몸이 스르르 녹는다.
막걸리 한 통을 주문해 테이블에 동석한 어르신들께 한 잔씩 돌리자 고목 같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오후 2시, 골목길을 나와 탑골공원 옆 낙원상가를 보니 제임스 딘과 마릴린 먼로 초상화가 그려진 실버 전용극장 간판이 걸려있다.
상영 중인 ‘사랑과 영혼’, ‘사운드 오브 뮤직’,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고전 명화들을 보기 위한 관람료는 55세 이상 경노 2000원, 학생 5000원, 일반 7000원이다.
한껏 치장한 멋쟁이 노신사와 할머니가 영화를 예매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들어간다.
오후 4시, 극장을 나와 낙원상가 위에서 탑골공원 주변을 내려다보니 머리고기를 써는 주방아주머니와 국밥을 안주 삼아 소주를 홀짝이는 노인의 모습이 여유롭다.
국밥 2000원, 커피 100원, 까치담배 200원. 이곳 노인들은 하루 2300원으로 노년의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었다.
서울시는 옆 나라 일본 도쿄의 ‘스가모 거리’를 벤치마킹해 탑골공원과 종묘공원 주변을 ‘어르신 거리’로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재정이 넉넉한 일본의 노인들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곳 어르신들이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데는 걱정이 없어야 하는 게 선행돼야 될 일이 아닐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해도 이왕 벤치마킹하려면 건강한 노년층이 사회에서 현직으로 활동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모습을 닮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오후 6시, 서울 여의도동 회사로 복귀하는 길에 ‘양주세트 29만9000원’이라고 써진 전단지가 눈에 밟힌다. 그렇게 또 서울의 하루는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