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장원재기자의 스포츠人] “이제는 팬으로 축구장 찾아요”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41130010015479

글자크기

닫기

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4. 12. 02. 10:34

이상철 前 올림픽 축구대표팀 코치
KakaoTalk_20241130_222249724
이상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코치/ 사진=장원재 선임기자
그의 생애엔 한국 축구 미완의 꿈이 서려있다. 이상철(66) 전 2004 아테네 올림픽 수석코치다.

- 축구는 언제 시작했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했다. 정식 등록 선수로 뛴 건 경신중학교 2학년 때부터다."

- 그럼 그전까지는 무적 선수였나.

"그냥 동네 축구 한 거다. 중학교 2학년 때 차범근 감독의 스승이신 장운수 선생님이 이북 사투리로 '너 축구 한번 해볼 테?'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시작했다."

- 스타트가 좀 늦었다.

"맞다. 많이 늦었다."

- 축구를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동네 축구를 좋아했다. 동네 축구 스타였다. 축구 명문학교인 경신중학교에 입학하고 매일 가슴이 뛰었다."

- 왜 그랬나.

"김진국, 차범근 같은 선배님들이 당시 경신고 선수였다. 김진국 선배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차범근 선배가 고1이었나 고2였나 그랬다. 운동장에서 그 분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축구에 대한 매력에 점점 빠졌다. 나도 축구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 경신중 졸업 후 경신고로 갔다. 같이 뛴 선수는.

"쌍둥이 대표선수 김성남, 김강남 선수가 있었고 박종원 선수도 있었고 유능한 선배들이 참 많았다. 박항서는 제 후배다. 한국 축구를 빛낸 선후배들이 많다."

- 고대로 진학했다면 고등학교 때 성적이 꽤 좋았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제2의 차범근이라고 했다. 고대 갔을 때는 주변에서 다들 제가 전국 랭킹 1위라고 했다."

- 대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면.

"대학교 2학년 때 대학 선수권에서 득점상을 받은 것이다. 1학년 때 부상으로 한참 동안 운동을 못 했다. 연습 중에 피로 골절이 왔다. 상당히 오랫동안 훈련을 못해 어려움이 많았었는데 복귀하자마자 득점상을 받은 거다."

- 병역은 어떻게 해결했나.

"상무팀으로 갔다. 국군체육부대가 생긴 이래 상무팀 1기다. 그때가 해군은 해룡, 공군은 웅비, 육군은 충의 등 팀이 따로 있었는데 그게 하나로 상무가 됐다."

- 상무 시절 동료로는 어떤 선수들이 있었나.

"이장수, 박항서, 오세권, 오석재 등 좋은 선수들이 많이 있었다."

- 대학 졸업 후 바로 입대했나.

"아니다. 대학 졸업하고 나중에 대우 축구단의 모태가 된 실업축구 새한자동차 축구팀에 입단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역임하신 이종환 회장께서 감독하실 때다. 거기서 1년 하다가 상무팀에 갔고, 제대 후 울산 현대 프로축구단이 창단하면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1983년 말이다."

- 1984년부터 리그에 참가한 현대팀 창단 멤버는.

"허정무, 최강희, 김평석, 김종환 등이 있었다. 우승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 어떤 점이 어려웠나.

"대우나 포항제철은 실업팀 때부터 역사가 깊었다. 그래서 안정감이 있었다. 럭키 금성이나 현대 같은 신생팀에게는 없는 장점이었다."

- 지금과 1984년에 프로리그를 비교하면 어떤 면에서 제일 차이가 큰가.

"그때만 해도 운동장이 없어서 맨땅 구장에서 훈련했다. 그것도 그때 그때 빌려서 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장비나 재활 등 시스템적으로 선수를 서포트하는 것도 지금보다는 열악했다."

- 경기 후 아이싱이나 재활 개념이 없었나.

"재활 닥터하고 물리치료사 한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인력이 다였다. 다치고 나면 마사지 받고 지압 받고 그게 전부였다. 재활이라든가 체력회복 등을 시스템적으로 관리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다."

- 계속 맨땅에서 훈련하고 경기 때만 잔디구장을 썼나.

"그렇다. 가끔은 잔디에 가서 연습하고 나중에는 또 인조 잔디 가서도 했다. 주 훈련은 숙소 앞에 있던 맨땅 구장에서 했다."

- 1984년에는 토요일, 일요일에 2연전을 하던 시절이다.

"그렇다. 흥행을 생각한다고 주중에는 경기가 없었다. 그렇게 이틀에 두 경기 한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건데 그 후로 많이 좋아졌다."

- 지금 기준으로는 조금 이른 나이인 만 30세에 은퇴했다.

"그때 감독님이 새로 바뀌면서 조중연 감독님이 물러나시고 김호 감독님이 오셨다. 김감독님이 제 장점을 인정 안 해준다고 생각했다. 고민하다 그만두는 게 낫겠다 싶어서 결정했다."

- 김호 감독 부임 후 바로 은퇴했나.

"1년 더 하다 은퇴했다. 제 플레이 스타일과 감독님이 추구하는 축구가 달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제주 유나이티드, 당시 유공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는데 현대맨으로 남기 위해서 바로 은퇴했다."

- 은퇴 후 행보는.

"1987년에 은퇴하고 모교에서 잠깐씩 선수들을 봐줬다. 1994년에 고재욱 감독 부임 후 현대 호랑이 축구단에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 지금도 생각하면 진한 안타까움이 남는 대회가 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다.

"그때 코치로 갔다. 2002년 멤버들이 많이 있었는데 와일드카드로 쓴 김남일 선수가 중간에 부상으로 뛰지 못한 것이 컸다. 박지성 선수도 뛰고 싶어 했는데 네덜란드 아인트호벤 구단에서 허락을 안 해줬다. 김남일, 박지성이 다 뛰었다면 메달도 가능했다."

- 4강까지 올라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좋은 조건이 많았다.

"선수 구성도 좋았다. 이천수, 조재진, 유상철, 정경호, 김정우, 김동진, 최태욱 등이다. 그 팀에서 지금의 한국 축구를 이끌고 있는 유능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다."

- 3 대 0으로 지다가 3 대 3으로 쫓아간 경기가 특히 감동적이었다.

"조별리그 말리와의 경기였다. 동점골이 터졌을 때 벤치고 피치 위고 다 난리가 났다.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짜릿했다. 그때는 월드컵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을 때라 시청 앞 광장에서도 난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월드컵 때 이상으로 많은 팬이 나왔다고 했는데, 메달을 못 따 죄송할 따름이다."

- 울산대 감독을 하다 울산 현대 수석 코치로 왔다. 2005년이다.

"좋은 감독님들 모시고 두 번 우승했다. 울산의 별 5개 중 2개를 따던 현장에 있었다는 자부심이 있다. 지도자 생활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 가장 기억나는 제자라면 누가 있나.

"대학 제자로서는 지금 강원 수석코치로 일하는 정경호 선수다. 제가 '머리가 나쁘다'라고 질책하니 방까지 찾아와서 자기 IQ가 얼마라고 똑부러지게 얘기했던 똑똑한 친구다. 지금 지도자 생활 잘하고 있어서 뿌듯하다."

- 프로에서 기억나는 선수는.

"김신욱, 이호 선수다. 둘이 국가대표가 됐을 때 '시작은 미비하지만 끝은 창대할 것'이라고 성경 구절을 인용해 책에다가 사인해서 줬다. 지금도 그때가 참 감동적이었다고 얘기한다. 저는 두 선수의 대성을 확신했다. 자기들을 믿어준 데 대한 감사일 것이다."

- 선수 시절이나 지도자 생활로 돌아가서 딱 한 순간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어떤 순간을 선택하겠나.

"좀 더 화려한 선수 생활을 못한 것이 늘 아쉽다. 다시 한번 현역으로 돌아가 수만 있다면 최선의 노력을 해서 최고의 선수로 태어나고 싶다."

- 화려한 선수 생활 못한 이유는.

"지도자가 여러 가지 체격 조건이라든가 신체적인 강인함을 요구할 때 그 요구 수준에 제 피지컬을 잘 맞추지 못했다. 기술적인 스킬은 아주 좋았지만 지금 생각해 그런 부분에서 많이 좀 약했던 것 같다."

- 선수 시절 가장 당혹했던 순간이라면.

"대학교 4학년 정기전 때다. 부상으로 실려 나와 정신을 잃은 채로 병원에 실려 갔는데 눈을 떠보니 병상 주위로 여대생이 여럿이었다. 바로 다시 기절한 척 했다."

- 누구였나.

"같은 과 여학생도 있었고 응원하던 팬도 있었다."

- 난국을 어떻게 수습했나.

"끝까지 남아 간호해주던 사람과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 지금 하는 일은.

"부산에서 축구와 전혀 다른 파이프 제작 공장을 하고 있다. 물론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 회사에 납품하며 기반을 다졌다. 축구가 열리면 팬의 한 사람으로 축구 경기장 와서 후배들 격려하고 사업도 열심히 하면서 즐겁게 잘 살고 있다."

▲ 이상철(66)은 경신중고, 고려대를 나와 새한자동차, 상무, 현대 호랑이(1984~1987)에서 선수로 활약했다. 지도자로는 현대 호랑이 코치(1994~1998), 울산대 감독(1999~2005), 올림픽 대표팀 코치(2002~2004), 울산 현대 수석코치(2005~6/2009)를 지냈고 2002년 월드컵 당시 KBS 해설위원으로 방송활동을 했다.

KakaoTalk_20241130_222300405
이상철 코치(왼쪽)과 장원재 선임기자.
장원재 선임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