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재계에선 삼성그룹이 3세 경영을 위한 승계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장기적으로는 화학 계열부문이 이 사장에게 넘어가면서 ‘이재용(전자·금융)-이부진(호텔·건설·중화학)-이서현(패션·미디어)’ 3각 구도를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는 시각이다.
삼성그룹은 지난달 31일 삼성SDI와 제일모직을 합병한 데 이어 이달 2일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을 합병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장남인 이 부회장이 그룹 내 위상을 높일 수 있도록 전자 부문 수직계열화를 한 지 이틀 만에 장녀인 이 사장에게 화학 부문을 넘기려 사전 정지작업을 한 셈이다.
이번 사업구조 재편으로 이 부회장은 당분간 화학 부문에서도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게 됐다. 부회장이 관할하게 될 삼성전자의 최대 주주(지분율 20.38%)인 삼성SDI에 삼성석유화학 지분(21.39%)을 보유한 제일모직이 흡수합병되면서 화학 부문에서도 간접적인 영향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2월 기준 삼성전자 지분 0.57%를 보유해 개인으로는 이 회장(3.38%)에 이은 2대 주주다.
게다가 삼성종합화학의 최대 주주(38.68%)이자 삼성석유화학의 2대 주주(27.27%)인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7.18%)가 삼성SDI인 점도 이 부회장의 화학 부문 지배력을 강화해 기존 3각 구도 시나리오를 깨트리는 요인이라는 평가다.
전자뿐 아니라 화학 부문에서도 입지를 넓힌 이 부회장과 달리 이 사장은 화학 계열사 최대 주주 지위를 잃어 지배력이 약화된 것처럼 보이는 데 따른 결과다. 이 사장이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의 합병사에서 삼성석유화학 보유 지분(33.19%·최대 주주)의 7분의 1 수준에 그치는 4.91%의 지분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삼성석유화학의 최대 주주에서 합병 법인의 6대 주주로 바뀌게 된 셈이다. 합병 법인은 삼성물산(36.99%), 삼성테크윈(22.56%), 삼성SDI(9.08%) 삼성전기(8.91%), 삼성전자(5.28%) 등이 주주로 있다.
최근 두 차례에 걸친 사업구조 재편이 표면적으로는 이 사장의 그룹 내 입지가 좁아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업 재조정은 향후 3각 후계 구도 완성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관측이 더 유력하다. 이 회장의 세 자녀가 삼성그룹의 사업 영역을 나눠 갖기 위해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이나 주주 가치 훼손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점진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
삼성가 3세들의 승계구도는 향후 삼성물산의 사업 재조정에 따라 윤곽이 명확하게 드러날 전망이다. 삼성물산은 이 사장이 화학과 건설 부문을 승계하게 할 핵심 계열사다. 삼성종합화학-삼성석유화학 합병 법인의 최대 주주인데다 건설 계열사 삼성엔지니어링의 2대 주주(7.81%)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삼성물산의 상사·건설 부문을 분리한 뒤 건설 부문을 삼성엔지니어링과 합병하는 사업 재조정이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도 거론되고 있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엔지니어링 지분 전량(203만6966주)을 매입하면서 2대 주주로 오르는 등 건설 부문에서도 사업 재조정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삼성SDI가 이미 삼성엔지니어링 지분 전량을 팔았기 때문에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얻게 된 삼성엔지니어링 지분(13.10%) 역시 처분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삼성물산 분리·합병하는 과정에서 이 지분을 어떤 방식으로 희석할지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삼성그룹 측은 최근 사업구조 재편에 대해 승계구도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사업 효율성을 위해 내부 인수·합병(M&A)을 한 것”이라며 “경영승계 등 다른 변수는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