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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까막눈 할머니가 여든 지나 눈 뜬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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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필 기자

승인 : 2013. 03. 20. 09:27

*[희망100세] 전남 영암 왕인문해학교 수업 참여기
사진= 허욱 기자 hw42moro@asiatoday.co.kr

아시아투데이 이정필 기자 = 대학은 고사하고 초등학교도 못 다닌 사람이 있다. 토익
·토플은 커녕 ABC도 모르는 사람. 그런데 자식은 대기업에, 손자는 영어유치원에 보낸 사람보다 밝게 웃는다. 여든이 넘었는데 도시의 웬만한 60대보다 젊어 보인다.

이런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받는 수업이 있다. 태어나 처음 정식으로 받아보는 수업. 그렇기에 더없이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수업. 그러면서 누구도 비방하지 않는 구수한 욕설과 웃음이 가득한 수업.

19일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 마을회관을 찾았다.

서울 여의도동 아시아투데이 본사에서 차로 6시간을 내리달려 마을에 도착하니 입구에 걸린 ‘왕인문해학교’ 현수막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왕인은 고대 일본에 한자를 전한 백제의 학자로, 그의 석상과 유적지가 위치한 영암에서는 매년 관련 행사가 열린다.

마을회관 안 사랑방에 들어가니 ‘마음 좋은 여편네, 시아버지가 열이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청춘이다’ 같은 실생활에서 쓰일 법한 문장들이 칠판에 적혀 있었다.

수업이 가까워지자 동네 할머니들이 공책과 연필·지우개가 담긴 손가방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든다.

이번에 곗돈 탈 차례가 누구라든지, 얼마 전에 손녀를 봤다든지 하는 이런저런 환담이 오간다.

오후 2시. 양미경(47·여)·나진(46·여) 두 교사가 사랑방에 들어오자 반장 할머니가 일어선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선생님 안녕하세요.”

수업이 시작되고 숙제검사가 이어지자 화기애애했던 사랑방은 금세 숙연해진다.

“아따, 엄니! 나가 이것은 쌍시옷이라고 했으 안했으.”, “니미럴, 머리통이 비어서 배우면 까먹는데 어떻게 혀. 좀 봐줘잉.”

할머니들의 반복되는 실수를 교사들이 다그쳐보지만 애교 섞인 핑계에는 당하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일상화된 시대지만 아직도 한글을 모르는 성인문해교육 필요 대상자는 2010년 기준 577만 명을 넘는다.

이는 20세 이상 전체 인구의 15%를 넘는 수치로 유년시절 어려운 환경 탓에 공부할 시기를 놓친 농어촌 지역의 노년층이 대부분이다.

2008년부터 왕인문해학교를 운영해온 영암군은 지도교사가 마을회관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한글과 산수 등을 휴농기를 이용해 하루 2시간씩 주 3회 교육으로 진행한다.

현재 11개 읍·면 65개 마을의 노인 1000여 명이 한글을 깨우치며 새 삶을 열어가고 있다.

이날 찾은 월평리 간은정 마을에선 글씨를 못 읽어 제초제를 농약인 줄 알고 논밭에 뿌린 사연이나, 숫자조차 몰라 버스를 탈 때마다 기사에게 물어봤다는 노인들의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다반사다.

사정을 아는 마을 공무원이나 농협 직원들은 할머니의 얼굴만 보고 알음알이로 업무를 대신 처리해주곤 했다.

하지만 글자와 숫자를 익히면서 이제는 버스를 혼자 타고 은행일도 직접 볼 수 있게 됐다는 할머니들의 표정에는 자부심과 만족감이 역력하다.

문해교실 최고령 학생이자 ‘욕쟁이 할머니’로 통하는 이소녀씨(83)는 “내가 글씨를 몰라서 욕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여. 염병 ‘글자 또 나와부렀어’ 하고. 근디 이제는 글씨를 안께 속이 시원혀. 얼마 전에 손주 결혼식이 있었는디 축의금 봉투에다가 나가 직접 ‘손주 결혼 축하해’라고 썼당게. 평생 글씨를 써본 적이 없었응게 온가족이 다 놀라 자빠져부렀지”라며 깔깔 웃는다.

숙제검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문장받아쓰기 교육이 이어진다.

양 교사의 낭독에 할머니들은 귀를 기울이며 한 글자씩 써내려간다.

삐뚤빼뚤 글씨체에 맞춤법도 제각각이지만 수업에 임하는 열성과 진지함은 어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뜨겁다.

받아쓰기를 하는 동안 나 교사는 책상 사이를 돌며 할머니 한 분 한 분의 개인지도를 담당한다.

“나 좀 더 봐줘잉.”, “아따, 엄니는 됐당게. 미치게 잘해부러.”, “척이면 척이지 그랑께.”

서로 조금이라도 개인지도를 더 받기 위한 할머니들의 ‘선생님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학생이 얌전하고 착하다”라는 문장을 양 교사가 낭독하자 한 할머니가 “학생이 불량하다고 써버려잉. 저 할망구 아까 담배피우고 왔어”라고 추임새를 넣으며 일순간 교실은 웃음바다가 된다.

“엄니, 담배 피우면 몸에 안 좋당게잉.”, “아, 오래 살아 뭐혀. 살 만큼 살았구만.”, “한글 배워서 연애편지 써보는 게 소원이라매.” 또다시 폭소가 터진다.

20문장을 받아쓰는 데 30분이 넘게 걸릴 만큼 두 교사는 하나라도 학생들에게 더 가르쳐주기 위해 신중을 기한다.

양 교사는 “외국어를 배울 때와 마찬가지로 할머니들이 글을 읽는 것 까지는 금방 하는데 쓰는 게 가장 힘들다”며 “고령이라 기억력도 떨어지기 때문에 반복학습이 효율적이다. 할머니들이 워낙 열심히 하기 때문에 교사들도 즐겁고 행복해진다”고 귀띔했다.

나 교사는 “작년에 93세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분이 굉장히 잘하고 습득도 빨랐다”며 “처음에는 ‘ㄱ’과 ‘ㄴ’도 몰랐는데 어찌나 빨리 배우는지 가르치는 보람이 느껴질 때가 항상 최고의 순간인 것 같다”고 회상했다.

어느 교실에나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이 나오는 법. 비교적 한글을 거의 다 익힌 할머니는 쌍자음 받침이라는 난관에 봉착한 할머니를 도와준다. 교사에게 받은 재능기부가 자연스레 선순환되는 현장이다.

그 와중에 옆자리 우등생의 공책을 흘깃하며 커닝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익살스럽다.

받아쓰기 채점이 모두 끝나고 치매예방 박수치기와 인사로 이날 수업이 마무리된다.

수업이 끝나도 몇몇 할머니들은 숙제를 하고 저녁밥을 지어 먹으며 사랑방에 머무른다.

오후 6시가 지나자 석양이 뉘엿뉘엿 넘어간다.

‘건강하시라’고 할머니들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돌아가는 길.

욕쟁이 할머니와 반장 할머니가 그새 정이 들어 못내 아쉬운 듯 문 앞까지 배웅을 나온다.

“또 와야 혀. 조심히 들어가고잉.”

쉽게 발이 안 떨어진다.

차량 백미러로 멀어지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스펙경쟁이 난무하는 도시로 향했다.

이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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