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딘, 마릴린 먼로, 브루스 리, 오드리 헵번...
이름만 들어도 고전영화팬의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배우들이 서울 한복판에 모였다.
처녀총각시절 이들이 출연한 작품을 봤던 사람들은 어느새 20~30대 자녀를 둔 장년층이 됐지만 다시 한 번 청년으로 돌아가 추억에 빠져들었다.
봄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9일 오전 서울 중구 충정로 문화일보홀에 위치한 ‘청춘극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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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청춘극장 매표소 /사진= 허욱 기자 |
“저희 청춘극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영화 ‘청춘극장’은 오늘이 마지막 상영입니다. 커피와 스낵은 이쪽에서 티켓을 교환하시면 되고요. 10시에 영화 바로 시작합니다.”
전날 이전개관식을 치른 극장 입구에 들어서자 안내를 도와주는 어르신 한 분이 밝게 웃는 얼굴로 동년배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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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 매표소 앞에서 손님들이 영화를 예매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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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회에서 나온 어르신이 정문 앞에서 영화관람을 돕고 있다. |
청춘극장은 ‘대한민국 최초의 실버 전용 영화관’이라는 기치 아래 2010년 서울 서대문 아트홀(옛 화양극장)에서 개관했다. 지난해 서울 은평구 연신내 메가박스 8층으로 자리를 옮긴 후 이번이 두 번째 이전이다.
개관 후 입소문을 타면서 꾸준한 인기로 누적관객 40만명을 향해 달리던 극장은 새 단장을 감행하며 재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문화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장노년층의 니즈(needs)를 반영해 이용이 편리한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인근으로 둥지를 튼 것이다.
입장료는 55세 이상 2000원으로 관내 카페에서 커피와 둥글레차, 강냉이 등이 무료로 제공돼 관람객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었다. 보고 싶은 영화나 듣고 싶은 음악도 신청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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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내 뮤지박스에 듣고 싶은 추억의 팝송 등 음악을 신청할 수 있다. |
대한노인회에서 나온 자원봉사자 어르신들은 5명씩 6교대로 일하며 동년배 관람객들의 편의를 돕는다.
깨끗한 화장실과 냉온정수기, 장기·바둑과 무릎담요, 빈 공간마다 어김없이 마련된 긴 소파와 2층짜리 건물임에도 설치된 엘리베이터 등에서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책장이 가지런한 북카페에서 상영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의자에 앉아 책을 보고 있다.
세계고전과 함께 김동리의 ‘감자’와 박경리의 ‘토지’, 동의보감, 장길산 등 국내소설이 주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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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안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 영화상영을 기다리는 사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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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안내서를 보고 있다. |
상영관으로 향하는 복도와 계단 벽면에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걸린 명배우들의 출연작 포스터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향수에 젖게 만든다.
“잉그리드 버그만이랑 험프리 보가트네. 저 익숙한 얼굴은 누구더라?”라는 한 할머니의 혼잣말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저 사람은 말론 브란도지. 왜, 대부 주인공 있잖아”라고 들뜬 표정으로 대답한다.
상영관 안으로 들어서니 배우자나 친구와 함께 극장을 찾은 어르신들이 자리 곳곳을 메우고 있다.
원래 공연장이던 이곳은 1~2층 총 260석 규모의 실버 전용 극장으로 탈바꿈됐다.
오전 10시, 2층 객석 뒤편에 있는 영사기에서 영화 ‘청춘극장’ 필름이 돌아간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기 직전인 1940년대를 배경으로 젊은 남녀 사이의 얽히고설킨 애정관계를 담은 영화는 1959년 원작 개봉 당시 1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됐다.
이날 상영된 것은 1975년 리메이크 작이다.
신영일김희라김창숙정윤희 등 당대 스타의 전성기 모습에 관객들은 영화를 처음 봤던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잠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영화에 몰입한 청춘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주인공의 엇갈린 운명이 극에 달하자 여기저기서 ‘아!’하는 탄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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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있다. |
“정윤희가 이걸로 떴잖아. 그 때 인기 좋았지.”
영화가 끝나자 현실로 돌아온 관객들이 옛 기억을 떠올리느라 시끌벅적하다.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신계선씨(76·여·서울 내발산동)는 “감수성이 풍부했던 처녀시절 소설책으로 보고 이후 영화로도 봤던 청춘극장을 같은 이름의 극장에서 보니 자연스레 첫사랑 생각이 난다”며 손수건을 훔쳤다.
극장은 매달 영화 4편을 준비해 주마다 바꿔 상영한다. 이달은 첫 테이프를 끊은 ‘청춘극장’을 시작으로 ‘율리시즈’, ‘그대를 사랑합니다’, ‘레미제라블’이 준비 중이다.
문화프로그램으로 △ 노년기 정신 건강 강좌 △ 어르신 스타일 코디 △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 상담 △ 웃음 치료 △ 노래 교실 등도 열린다.
토요일에는 △ 가요쇼 ‘추억의 버라이어티’ △ 연극 ‘아리랑 랩소디’ △ 북한 예술공연 ‘평양 예술단’ △ 악극 ‘신파 유랑극단’ 등 다양한 공연 프로그램이 돌아온 청춘들을 기다린다.
이쯤 되면 청춘극장이 아니라 ‘청춘교실’이라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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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내부 전경 |
“젊은 사람들이 어쩐 일로 왔어?”
청춘극장에서 일하는 게 행복하다는 손철주씨(78·서울 북아현동)는 “봉사료를 조금 받긴 하지만 그건 별 의미가 없고 이렇게 나와서 일하니까 적적함도 달래고 좋아”라며 싱글 벙글 웃었다.
손씨는 “대한노인회 지부에 신청하면 되더라고. 건강이 허락되는 한 계속 나오고 싶어”라고 설명했다.
늦잠을 자느라 영화를 놓쳤다는 이청자씨(69·여·서울 대치동)는 “영화를 좋아해 서대문 아트홀 때부터 한 달에 서너 번씩 극장을 꼭 찾았다”며 “장노년층을 위한 문화시설이 주위에 별로 없다. 이런 곳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영화가 끝난 극장 대기실 스피커를 통해 엘비스 프레슬리의 ‘러브미텐더’가 흘러나온다.
어느덧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은 어디가고 극장에는 나팔바지에 스카프를 한 멋쟁이 처녀총각들이 손을 잡고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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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안을 가득 채운 영화 포스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