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낙헌 가래실 버섯농원 대표가 책을 보며 작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매일 관련 서적을 읽는다는 그는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될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광주(경기)=송병우 기자 SONO@ |
광주(경기)/아시아투데이 송병우 기자 = 경기 광주 도척면에 위치한 가래실 버섯농원. 지난 20일 오후 도착한 농장은 버섯 내음으로 가득했다. 한쪽 사무실에서 한 남자가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은 농사와 작물에 관한 서적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틈 날 때마다 작물을 연구해요. 농사도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온화한 미소에 점잖은 말투로 기자를 맞이해준 이 남자. 흔히 생각하는 농부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가래실 버섯농원의 대표이자 지난 1998년까지 한 대형 은행에서 근무했던 정낙헌씨(60)다.
"20여년을 금융맨으로 살았습니다. 은행이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하며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지요."
당시 정씨는 잘 나가는 은행가였다. 재산이 수천억원인 사람들도 그를 믿고 은행에 돈을 맡겼다. 경영진의 신뢰도 한몸에 받았다. 회의 자료를 만들기 위해 회사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였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1980~90년대만 해도 직장인들이 지금처럼 자기계발을 하고 스펙을 쌓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웬만해선 해고당할 일도 없고 자기 자리에서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월급이 꼬박꼬박 나왔죠."
그의 직장이 없어진 건 1998년 6월이다. 당시 나라 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맞아 국제통화기금에서 돈을 빌려다 쓰고 온 국민이 금을 모은다고 야단이었다. 정씨가 몸 담았던 은행도 그때 문을 닫게 됐다.
"점심 식사를 하고 사무실에 들어왔는데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TV에는 우리 은행을 퇴출한다는 금융감독원의 발표가 나오고 있었죠."
충격은 컸다. 자신의 젊은 날과 열정을 한곳에 쏟아 부었지만 회사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45세. 정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20년을 은행만 생각하며 살았던 그였다. 인맥은 넓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게 두려울 만큼 공황 상태에 빠졌다.
"뭘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택시나 요식업은 사람을 대해야 하기 때문에 싫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있는 것도 피했습니다. 내가 먼저 관둘 때까지 나를 버리지 않을 직장이 어디일까 스스로 묻고 또 물었죠."
◇땅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정씨가 처음으로 농사를 접한 건 그해 9월이다. 고객으로 알고 지내던 한 지인이 경기도 과천에 있는 자신의 텃밭을 소개해줘 처음 가보게 됐다. 한달 정도 밭을 일구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까지 정씨는 한번도 귀농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가진 건 삽 한자루밖에 없었죠. 날이 밝으면 농사를 짓고, 힘들면 막걸리 한잔하고 밭에 누워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했어요. 흙냄새를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그는 결국 농사를 짓고 살기로 결심했다. 땅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동의였다. 무엇보다 아내의 도움이 절실했다.
"아내에게 고마웠어요. 농사로 먹고 살겠다고 했을 때 아내는 딱 한마디 했어요. '그래? 잘하자. 당신이 나 하나 못 먹여 살리겠어?'라고요."
그렇게 40대 중반의 부부는 겁 없이 농업에 뛰어 들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직장을 잃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농업 교육을 실시했다. 이는 각 시·도별 기관이나 군청, 농업진흥청을 통해 이뤄졌다. 정 대표도 치열하게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단기간에 최대의 수익을 내는 작물을 연구했다. 결론은 버섯이었다.
그는 진흥청의 교육을 수료하고 경기 광주의 한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갔다. 실전 훈련이 필요했다. 농사 잘 짓는 사람 한명만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정 대표는 지금 귀농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준비기간을 가지라고 조언한다. 일종의 수련인 셈이다.
"하루아침에 농사를 지을 수는 없어요. 직장인은 주말에 짬을 내서 텃밭도 가꿔보고 휴가 기간에 자신이 구상중인 지역의 사람들과 네트워크도 형성해 보고, 그런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구체적인 실행 단계에 들어서면 귀농의 장소와 작물을 결정하는 거죠."
"농사짓고 싶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귀농과 귀촌의 구분을 잘 못합니다. 귀촌은 전원 생활이 좋으면 쉽게 할 수 있지만 귀농은 여기서 소득을 얻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달라요. 귀농을 하는 순간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그런 과정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정씨는 "젊은 시절에 그랬듯 열심히 하면 농업에서도 상위 10%에 들 수 있다고 자기암시를 주곤 했다"고 한다. 그가 느타리 버섯과 삶을 꾸려 온지도 벌써 13년째다. /광주(경기)=송병우 기자 SONO@ |
다행히 요즘 농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생을 덜 한다는 게 정씨의 설명이다. 온·오프라인의 다양한 기관에서 교육과 지원을 방대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정 대표는 "마음만 먹으면 쉽고 빠르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제 3의 작물을 연구하고 기관을 통해 공부 중이다.
"은행에 있을 때 항상 스스로 상위 10%의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럼 농사도 상위 10% 안에 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시련이 닥칠 때마다 할 수 있다고 자기암시를 주면 결과는 항상 좋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40대 이후 '인생 2막'이 자의보다 타의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65세까지만 일하고 이후에는 놀면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이제는 나이를 먹고 놀면 재미가 없어 못 견딜 것 같다며 손사래를 친다.
정씨는 3년 전부터 아내와 인생 3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틀에 한번 정도는 하루 일과를 마친 후 둘이 소주 한병을 나눠 마신다. 그는 다섯잔, 아내는 두잔. 그러면서 미래에 대한 대화를 한다. 정씨는 조심스레 그의 인생 3막에 대해 귀띔해줬다. 새로운 도전의 키워드는 체리였다.
"하루는 아내가 미국산 체리를 너무 맛있게 먹는 거에요. 하루는 경북 김천에 체리나무가 있다고 해서 갔는데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죠. 그때부터 체리 농사의 방법과 장단점, 수익성 등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체리가 현대인에게 가장 적합한 과일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큰 과일을 좋아하지만 세대가 변하면서 점점 작은 쪽으로 수요가 늘 것이라는 분석도 덧붙였다.
"체리를 선택한 이상 반드시 수입산 체리들과 붙어서 이겨낼 생각이에요. 지난해 가을부터 호밀과 천연비료 등의 녹비작물(비료)을 심어 놨습니다. 내년 봄부터 시험 재배에 들어가고 그 이후 농작 계획을 좀 더 구체화할 겁니다."
3년전부터 정씨는 자신의 인생 3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제3의 작물을 체리로 결정하고 내년 봄 시험 재배에 들어갈 예정이다. 물론 노하우가 쌓인 버섯 농사도 함께 한다. /광주(경기)=송병우 기자 SONO@ |
정씨는 귀농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는 골든에이지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성공이요? 공부하세요. 연구하고 또 연구하세요. 철저히 준비하는 거죠. 그 다음 겁먹지 말고 도전하면 됩니다. 우리 인생은 3막, 4막까지 있는데 이제 겨우 2막 문턱에서 뭐가 두렵다는 겁니까. 자기 인생은 자기 의지대로 펼쳐집니다.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 와요. 100세 시대에 우리 인생은 3모작으로도 부족하죠."
정씨와의 인터뷰는 네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하지만 예순의 남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빠져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