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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농동 다일교회 목회실에서 최일도 목사가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 이정필 기자 roman@ |
아시아투데이 이정필 기자 = 25년 전 나흘 동안 밥을 못 먹어 영양실조로 쓰러진 모르는 사람에게 주머니를 털어 설렁탕을 사 먹인 청년이 있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해외 유학을 준비하던 그 청년은 이 일을 계기로 국내에 남아 밥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그 청년은 대한민국이 다 아는 머리에 서리가 내린 중년의 다일공동체 밥퍼나눔운동본부 대표 최일도 목사(56)가 됐다.
8일 최 목사와의 일문일답.
-다일공동체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독일 유학을 꿈꾸던 신학생 시절에 청량리역 광장에 쓰러져 있던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난 것이 지금의 다일공동체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됐다. 춘천을 다녀오기 위해 청량리역에 갔을 때 눈앞에서 한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됐고 처음엔 ‘내가 할 일은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지나쳤지만, 늦은 저녁 돌아온 청량리역 광장에서 다시 그 할아버지를 만나 큰 충격을 받았다.
하루 종일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 누워 계신 것. 어떻게 보면 역 광장에 그냥 방치된 현장을 보고 가슴에 뜨거운 불꽃이 일었다. 도저히 또다시 지나칠 수가 없어 다가간 할아버지에게 나도 모르게 물은 첫마디가 “할아버지, 진지는 드셨나요?”였다. 돌아온 대답은 힘들게 들어 편 네 손가락이었다. “네 끼를 굶었다고요?”물었더니 나흘을 굶었다는 표현이었다.
나흘을 굶은 함경도 할아버지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사서 대접하고 그 할아버지와의 만남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거듭되면서 바닥에 퍼질러 앉아 라면을 끓인 것이 처음 시작이다. 가난한 신학생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 선택한 방법이었다. 역 광장에 나가 버너에 불을 붙여 라면을 끓여드린 아주 작은 일이었다. 때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를 외치며 올림픽에 들떠있던 1988년 11월이었다.”
-다일공동체를 운영하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많았을 것 같은데.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빈민선교와 봉사활동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본인이 어렵다고 생각해야 어려움인 것 같다. 돌아보면 어려웠던 일보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 더 많았다.
지금 가장 보람된 것은 24년 전 밥퍼에 와서 노숙하며 밥을 먹던 밥상공동체 가족들이 지금은 밥퍼의 가장 오래된 봉사가가 됐다는 사실이다. 받은 섬김, 받은 사랑을 되돌리겠다며 지금은 그 누구보다 열심인 자원 봉사자들과 후원 회원들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한 사람, 한 영혼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큼 세상에서 보람된 일이 없더라.
또 밥퍼가 25년 동안이나 계속되면서 쌀이 없어서 밥을 못 드리는 일은 단 하루도 없었다. 서울시나 보건복지부의 도움 없이도 그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통해 필요치가 계속 채워졌다. 이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있을까.”
-아직 우리나라의 극빈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는데 해외로 봉사영역을 넓힌 이유는.
“우리나라는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과 집단이기주의로 고통 받고 있다. 제3세계의 절대빈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물론 우리도 극빈층의 밥 굶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밥퍼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밥퍼는 이 땅에 밥 굶는 이가 없을 때까지다. 이 세상에 밥을 굶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 밥을 짓는 것이 밥퍼의 정신이다. 먹고 사는 문제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한다. 밥을 나누는 것에는 우리나라 다른 나라 구별이 없고 인종도 피부색도 제한을 둘 수 없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빈민촌을 가서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나. 절대빈곤의 현장에 가보면 한 생명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또 우리가 돌봐야 하는 북한도 머지않아 밥퍼에서 반드시 밥을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소망하며 차근차근 준비 중이다.
한 가지 분명히 이것만큼은 우리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 살인강도도 사형언도나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도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밥을 지어 주고 있다. 생명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한 생명을 위해 이 땅에 밥 굶는 이 없을 때까지 밥퍼는 계속돼야 한다.”
-교회와 성당, 절 등 종교단체에서 무료급식을 베푸는 경우가 많다. 정부 차원에서 어떤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보나.
“예전엔 그랬다. 정부와 당국은 왜 이런 대책을 안세우고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대통령이 바뀌어야, 시장이 바뀌어야, 구청장이 바뀌어야 정책이 바로 서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서 25년간 사회봉사 생활을 하다 보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일은 정부와 당국에 안 되고 있는 것을 요구하고 바뀔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작은 것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이 소시민들을 위해서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한다는 것이 다일공동체 섬김의 원칙이다.”
-밥퍼 외에도 병원과 해외 등 봉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다일공동체가 하는 모든 사역의 바탕은 십시일반(十匙一飯)의 정신이다. 밥퍼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필요한 만큼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섬기며 나눌 수 있었다.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밥퍼에서 밥을 나눴고, 살린 생명을 싸매고 치료하기 위해 전액무료인 다일천사병원을 개원했다.
이제는 영성생활수련원을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잘 사는 길, 웰빙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잘 죽는 것, 웰다잉을 실현하기 위해 노숙인 임종자의 쉼터인 다일작은천국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들이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들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월 만원씩, 2만원씩 도와주는 후원자들과 자원봉사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은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탄자니아에서 밥퍼와 더불어 클리닉, 유치원, 한글교실, 컴퓨터교실, 도서관, 체육관 등이 해당 국가의 필요한 부분에 따라 운영되고 있다.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는 부족함이 없도록 도우시는 분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뮤지컬 ‘밥 짓는 사랑 퍼주는 사랑’을 본 소감은.
“이 뮤지컬을 기획하신 분이 밥퍼의 원작자인 나에게 10년 전부터 부탁했지만 계속 거절해왔었다. 현재 생존해있는 본인의 이야기를 그려낸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고 겸연쩍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세 가지다.
한국 기독교가 안으로는 자신감을 잃고 밖으로는 신뢰감을 잃어가는 시점에 조금이나마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면, 다음 세대인 청년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면, 작은 나눔과 섬김의 운동이 기독교 영성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에서였다.
많은 분들이 뮤지컬을 보면서 눈물도 흘리고 감동받았다고 말씀해주시는 걸 들으면서,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교회로 찾아오는 것을 보면서 내심 힘들었지만 하길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개인의 자전적 이야기 등 많은 책을 집필했다.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단지 어린 시절부터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분들이 나의 글을 좋아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최일도의 행복편지’를 써서 주위 분들과 나눌 정도로 글을 쓰는 일은 뗄 수 없는 일부분이다. 신학교 시절에 첫 시집을 펴냈는데 그때부터 광나루 시인이란 별명이 붙었었다. 시와 책을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피로가 많이 쌓일 때 시를 읽고 암송하면서 피로를 푼다. 말 잘하는 목사보다는 글 잘 쓰는 목사, 나아가 글 잘 쓰는 목사보다는 삶을 제대로 사는 목사가 되고 싶은 소망이 있다.”
-앞으로의 비전은.
“다일공동체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섬김과 나눔의 삶을 통해 화해와 일치의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청년들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청년들이 꿈을 꾸고 실현할 수 있도록 캄보디아에 아시아비전센터를 설립하는 일이다.
캄보디아에 이미 부지가 마련됐고 지난 한 해에만 캄보디아 다일공동체에 8만여명의 한국인과 외국인이 방문해 봉사했다. 이곳에서 아시아의 인재들이 바르게 양육 받아 각자의 나라에서 섬기는 리더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중이다.
또 11일 오전 11시에 개원될 아프리카 탄자니아 다일공동체를 위해 8일부터 열흘간 다녀올 예정이다. 더불어 북한 동포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이웃의 형제로 살며 도움을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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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중 웃음이 터진 최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