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이 말처럼 정치는 개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한 계층 또는 한 집단을 존재하게 할 수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가령 최근 논의된 ‘SNS 법’만으로도 우리의 온라인 공간에서의 행동은 크게 위축받을 수 있고 제제 당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개인의 문제는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정치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깊이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심지어 가장 큰 피해가 우려되는 농민들이나 자영업자들도 “수출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치며 FTA를 찬성하고 있다. 언론의 잘못된 보도와 스스로의 무관심이 만들어낸 안타까운 모습이다.
무관심은 결국 정치를 망친다. 우리 삶에 관련된 문제임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때, 중요한 법안들이 충분히 논의되지 않고, 피해에 대한 별다른 대책 없이 통과돼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이미 FTA는 지난 22일 국회를 기습 통과했고, 청와대의 승인을 거쳐 막바지 작업 중이다. 인정할건 인정하자. 그동안 우린 한미 FTA의 내용에 대해 논의가 부족했다. 언론마저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넋 놓고 있을 순 없다. 이제라도 FTA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다가올 피해와 영향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
이에 비록 FTA 관련 전문가는 아니지만, 민감한 사안과 알아야 되는 기초 사안에 대해 정리를 해보았다.
한미 FTA 비준안 통과 이후 이어지는 FTA 무효화 촉구 시위 |
◇투자자-국가소송제(ISD)
ISD 제도는 투자자가 국가의 정책(무역·투자 협정을 위반하는 행위, 계약 또는 투자 인가를 어기는 조치)으로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외국 투자자가 해당 정부를 국내 법원이 아닌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조정센터 등 제3의 국제단체에 구제를 요청할 수 있는 제도다.
ISD에 대해 FTA 반대 측은 다국적 투기자본이나 기업이 자신의 이윤확대를 위해 상대국가의 법과 제도를 무력화 시키는 조항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특히 ISD 해결 제도는 미국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해 찬성 측은 ISD는 이번에 새로 도입된 제도가 아니며, 우리 기업의 대미 투자를 위한 보호 장치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판결 역시 양국의 합의로 결정하기 때문에 미국에 유리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원칙적으로 살펴볼 때 ISD는 중재기관이 공정하게 판결을 내린다면 크게 문제되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판결에 힘의 논리가 작용한다면 미국 측에 유리하게 작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좀 더 세부적으로 알아보자.
우선 중재과정을 살펴보면 미국 워싱턴 소재 세계은행 산하의 민간기관인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가 주로 중재 역할을 맡는다. ICSID는 3명의 중재인을 두고 결정을 내린다. 당사자가 각 1명씩을 지목하며, 합의하에 1명을 정한다. 만약 합의가 안 될 경우 사무총장이 결정한다. 현재 ICSID의 사무총장은 캐나다인이다.
그동안 미국 측이 외국 정부를 제소한 경우를 살펴보면 모두 108건이다. 이중 승소는 15건. 그러나 아직도 제소한 사건의 반인 53건은 진행 중이고, 이미 확정된 55건도 18건은 양측이 합의해 소송이 종결됐다. 결국 합의한 건과 승소한 건을 모두 합치면 33건으로 미국 기업의 피해 요구를 상대 정부가 들어준 건은 확정된 55건의 절반이 넘는다.
반면 미국 정부가 피소된 경우는 6건인데 모두 미국 정부가 이겼다.
이 같은 내용으로 정리해 볼 때 ISD는 미국 측에 유리하게 작용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 기업이 ISD 제도를 근거로 한국 정부를 제소하면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할 수 없다. 사전동의조항에 따라 투자자가 분쟁을 국제 중재에 회부할 경우 한·미 양국 정부는 이 회부에 자동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중재 회부 결정권은 투자자에게만 있고 투자 유치국은 중재 회부에 대해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한다.
특히 공공부문 역시 ‘극히 심하거나 불균형적으로 미국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할 경우 ISD를 이용해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있어 공공부문의 피해와 붕괴가 우려된다. 만약 정부가 ICSID의 결정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FTA 특혜관세의 정지라는 관세 보복을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ISD 조항은 미국의 초국적기업에게 유리해 보인다.
◇래칫(rachet)조항(역진 방지장치)
한-미 FTA상의 투자 및 서비스장에는 ‘비합치조치’라는 것이 있다. 바로 ‘래칫’이라 불리는 역진 방지 조항이다.
‘톱니’라고 번역되는 래칫은 기계를 앞으로만 갈 수 있게 하고 뒤로는 가지 못하게 한다. 이 말처럼 래칫조항은 한번 개방된 수준은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이다.
이 조항에 대해 반대론자들은 광우병 쇠고기의 수입이나 건강보험 영리화, 공기업의 민영화도 우리 정부 마음대로 수정할 수 없게 만드는 독소조항이라 주장한다. 이는 한·미 양국의 입법권·행정권을 침해하는 전형적인 주권 침해 조항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이 조장이 적용되는 분야는 서비스로, 경제정책 운용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정당한 정책적 필요에 의해 규제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래칫 조항은 서비스와 투자에 관한 사항으로 모든 사안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중에서도 ‘현재유보’에만 적용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유보사항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유보목록은 국제법적 의무에서 면제를 받는 규제 목록으로 두 가지 유형의 유보목록이 있다. 하나는 한미 FTA 부속서 Ⅰ로 정리되어 있는 ‘현행규제권’이다. 정부는 이를 ‘현행유보’라 한다. 다른 하나는 부속서 Ⅱ의 ‘미래규제권’이다. 여기에서 제시한 규제 영역에서 국가는 새로운 규제를 추가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정부는 이를 ‘미래유보’라고 부른다.
이중 현행유보에 이름을 올린 목록들은 원상회복이 금지된다. 래칫조항의 적용이다. 참고로 검역 대상과 공공 서비스 부문은 포괄적 유보 대상으로 래칫 조항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쟁력강화가 필요한 일부 부분에선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행유보 목록은 아무리 큰 피해가 발생해도 국가가 이를 규제하긴 힘들어 보인다. 이미 스크린쿼터(의무상영일수)는 정부가 2006년 7월 146일에서 73일로 줄인 뒤 다시 73일 이상으로 늘릴 수 없다. 역진방지 조항으로 인해 한번 낮춘 의무편성비율을 다시 끌어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웬디커틀러 미국 측 FTA 수석대표와 김종훈 한국 측 수석대표가 악수를 하고 있다 |
이번 협정에서 양국은 서비스 분야에서 개방해야 할 분야를 조목조목 제시하는 것(Positive 방식)이 아니라 개방하지 않을 분야만을 적시했다. ‘네거티브(포괄주의) 방식’의 개방이다.
네거티브 방식은 개방하지 않을 분야를 부속서Ⅰ(현재유보), 부속서Ⅱ(미래유보)에 적어두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분야는 모두 개방하는 방식이다. 현재유보와 미래유보는 래칫조항에 설명했던 내용으로 우리나라는 한·미 FTA에서 현재유보 47개, 미래유보 44개 항목에 대해 권한을 유보했다.
FTA 반대 측에서는 이 조항으로 미래에 생겨날 새로운 서비스 시장은 무조건 모두 개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온갖 도박장, 섹스산업, 피라미드 판매업 등 미국의 서비스산업이 국내에 마구 들어와도 군말 없이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찬성 측은 서비스시장 개방을 포지티브 방식으로 전환해도 개방 내용이나 수준의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니어서 논의할 실익이 없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한미 FTA에서는 공익성이 높은 분야와 정부 규제가 강화될 중요 서비스 분야를 개방 대상에서 포괄적으로 유보해 정부 규제 권한이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서비스 시장이 네거티브 방식의 개방을 하게 되면 정부가 유보하지 않은 산업, 특히 미래의 서비스 산업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동적으로 개방될 것으로 보인다.
우선 현재 무규제 상태에 놓여 있는 민영의료보험에 대한 규제가 건전성 관련 조치 외에는 어려워지므로 지급률(보험료 대비 보험지급액) 규제, 상품 표준화 규제 등이 어려워질 것이다.
리먼 사태를 야기했던 미국의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책 마련도 논의해야 한다. 국내에선 공적 퇴직연금제도와 법정 사회보장제도만 제외하고 거의 모든 금융거래에 대한 규제가 사라질 전망이다. 특히 파생상품 등과 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서비스 분야는 미국이 한국에 비해 경쟁력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국내 시장이 위험하다.
게다가 지난해 미국과의 교역에서 제조업의 상품수지는 126억달러 흑자인 데 반해 서비스산업 수지는 123억달러 적자를 냈다. 서비스업이 전체 경제의 80%가량을 차지하는 미국과의 FTA는 앞으로 대미 서비스산업 수지를 더욱 악화시킬 확률이 높다.
다만 이번 협정에서 정부는 우려가 되는 각종 풍속 및 공중도덕을 해칠 위험이 있는 서비스의 경우 ‘서비스 무역에 대한 일반 협정’(GATS)를 통해 예외를 적용하고 있다.
GATS 14조는 공중도덕 및 공공질서, 인간 및 동식물의 건강 보건 보호 필요 차원에서 서비스 무역에 대해 제한을 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도박 또한 별도의 확인 서한을 통해 개방 대상에서 제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