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사회는 오래전부터 차기 유력 대선 후보 쪽에 줄을 대거나 정보를 흘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하기야 안 그래도 보신주의 복지부동(伏地不動)과 권력 동향 따라잡기에 도가 튼 공직사회가 지난 12·3 비상계엄 사태 후 5개월째 대통령 부재에 6·3 조기 대선(大選)을 40여 일 남짓 앞둔 상황이니 말해 무엇하랴.
계엄 사태와 관련, 대한민국 최강의 부대라고 하는 특전사의 사령관인 3성 장군은 육군 대장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이 진행하는 사적인 유튜브 채널에 국정원 차장 출신의 야당국회의원과 함께 출연해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 당시 "인원 끌어내라"는 지시를 했다가 "의원"으로 오락가락 말을 바꾸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 특전사령관은 민주당 의원들에게 회유를 당해 관련 답변을 작성했다는 휘하 707특수임무단장의 증언이 나왔다는 것이 국민의힘 측 주장이다. 특히 김병주 민주당 의원이 곽종근 전 사령관을 찾아가기 전날인 지난해 12월 5일 곽 전 사령관에게 전화로 질문 내용을 미리 불러줘 유튜브 출연 당시 원하는 답변을 유도했다는 것이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 당시 우리 선조들은 참혹한 7년 전쟁을 끝내 승리로 장식했다. 당시 나라를 구한 인물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늘 특히 충무공 이순신과 명재상 서애 류성룡, 약포 정탁 세분 위인을 떠올려본다. 지금 대한민국의 위기 상황과 맞물려 그분들의 위민(爲民), 공도(公道) 정신이 간절히 그리운 까닭이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발포만호(鉢浦萬戶)로 있을 때, 당시 전라좌수사 성박(成博)이 거문고를 만들 욕심으로 성내에 서 있던 우람한 오동나무를 베어서 자기에게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에 장군은 "국가재산을 함부로 개인 소유로 만들 수는 없고,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가꾸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공력이 들었는데 그것을 하루아침에 베어 없앨 수는 없다"며 따르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병조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정랑(정4품) 서익이 자신의 친인척을 불법으로 승진시키려 했다.(1580년) 그때 장군이 병조 직할 훈련원의 봉사(종8품)로서 그 문서를 만들어야 하는 하급 담당자였다. 이순신은 서익의 지시를 거부했다. 이 일로 이순신은 멀리 충청도 해미읍성의 군관(종8품)으로 쫓겨났다.
당시 이조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가 어려움에 빠진 이순신을 돕기 위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같은 덕수(德水) 이씨 집안으로 19촌 숙질간인 이이의 부름을 받아 두 사람이 만나면 인사청탁 의혹이 번질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은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리더십의 소유자로 꼽힌다. 오랜 기간 류성룡 연구에 천착한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서애 리더십'의 요체를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성(誠), 용(用), 공(公)' 세 가지로 풀이했다.
서애는 어떻게 이순신을 알아봤을까? 어떻게 종6품을 종3품 당상관으로, 육군을 수군으로, 그중에서도 요직인 전라좌수사로 임명했을까? 사람을 보는 그의 지감력(知鑑力)은 너무 놀랍고 적중했다.
임진왜란 당시 재상으로서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도체찰사를 맡아 전쟁을 진두지휘, 참혹한 7년 전쟁을 마침내 승리로 이끈 주인공. 류성룡이 없었다면 전황을 반전시킨 행주대첩, 한산대첩, 명량대첩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권력을 잡았지만 남용하지 않았고, 부(富)를 보고도 청백리로 근신했다. 당파싸움이 치열한 선조시대에 그는 오히려 정적들과 공존하려 했고, 중용의 정치, 상생의 정치를 했다. 동인이면서도 서인 율곡 이이의 문인인 신경진(辛慶晉, 청백리)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 종사관으로 늘 곁에 두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처형 위기에서 벗어나 전세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이 상소로 선조를 곡진하게 설득한 결과다. 당시 72세의 우의정 정탁은 이순신이 3도수군통제사에서 면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돼 선조가 그를 처형하려 할 때 1298자의 '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를 올렸다.
상소 덕분에 선조는 이순신에게 사형 대신에 백의종군(白衣從軍)을 시켰으니, 정탁은 이순신에게 생명의 은인이고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정탁이 이순신을 구명하는 행위는 당시 분위기상 죽기를 각오해야 했다. 정탁이 '나라를 구했다'라는 표현은 바로 이 신구차(伸救箚)의 공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순신, 류성룡, 정탁, 이 위대한 겨레의 스승이 보여준 공직자의 전범(典範)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 군인, 정치인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는 4월 28일은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이다. 올해는 그의 탄신 제 480주년이다. 때맞춰 오는 25~27일 서울 남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다큐픽션 창작오페라 '이순신-이순신과 류성룡의 위대한 만남' 공연이 펼쳐진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