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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는 것이다. 우리 경제의 버팀목 세대는 '워라벨(work-and-life balance)'을 기저에 깔고 일한다고 했다.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해 선진국 문턱을 넘은 우리에게는 피해갈 수 없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해도, 인구 급감에다 날로 치열해지는 경쟁국과의 경쟁을 고려하면 편하게 마음 놓고 삶을 여유 있게 즐기기에는 우리 경제가 그리 녹록지 않다고 걱정했다. 시중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때보다 경기가 더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돈다. 영세자영업과 고용 효과가 큰 건설업계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반도체 등에서 우리를 맹렬히 추격하고 있는 중국의 경우 정부가 직접 나서 기업에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고, 근로자들도 자청해서 야근을 마다하지 않는 등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일에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는 딴 세상을 살고 있다고 했다. 반도체 등 첨단 분야 근로자들은 주 52시간에 묶여있고 정부 보조금 지급은 저만치 멀어져 있다고 걱정했다. 모두가 발벗고 나서서 기술을 개발하고 혁신을 해야 하며, 경쟁국 못지않은 정부 차원의 지원도 발을 맞춰야 할 때라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기 행정부를 이끌어 가면서 관세로 전 세계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고 있다. 이른바 '관세 전쟁'이 미 국채 가격 및 주가 급락 등 부작용을 낳고 있어 후퇴할 조짐을 보이고 있기도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로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을 우리 모두가 목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80세를 앞둔 트럼프를 정점으로 정부가 일관되게 관세 인상을 수단으로 세계를 장악하려고 부심하고 있다. 중국과 일전(一戰)을 각오하고 있다는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관세 전쟁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예단하기 힘들다 해도 어쨌든 미국은 트럼프를 정점으로 행정부가 똘똘 뭉쳐 세계 각국 거대 기업들의 돈(자본)을 빨아들이고 있다. 높은 관세를 피하려면 미국 내에 공장을 지으면 될 일이라고 회유책을 내놓고 있다. 그래서 현대자동차 등 우리 대기업과 다국적 기업들이 앞을 다퉈 미국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트럼프 취임 후 겨우 100일도 채 안 됐음에도 미 행정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국정 목표를 착착 수행해 가고 있다. 트럼프가 지명한 각료들은 충성을 다해 트럼프가 내건 슬로건을 이행하느라 전 세계를 발로 뛰고 있다. 미국인으로서는 자국을 잘살게 한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민주당 등은 트럼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거침없는 행보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찌 해야 하는가. 적어도 경제 분야에서만큼은 강력한 리더십이 절실하다. 경제를 이끌 적임자가 트럼프발 글로벌 새 경제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을 찾도록 행정부를 독려해야 한다. 정치권은 경제가 위기를 헤쳐 나가 활로를 찾도록 행정부를 발벗고 나서서 도와줘야 함은 물론이다.
세계 경제는 돈을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전쟁을 이끌 야전군 사령관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지금, 누가 리더십을 발휘해 급변하는 대외 환경에 맞서 우리의 경쟁력을 지켜가고 제고할 수 있을까. 이미 비상계엄과 3번째 대통령 탄핵으로 막대한 국가 체력의 손실을 본 우리다. 여기에 더해 곧 있을 차기 대통령 선거까지 겹쳐 경제 리더십은 사실상 실종된 상태다.
이즈음 정부 관계자가 생각난다. IMF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인 1997년 말 당시 재정경제원 모 외화자금과장. 그는 출근하자마자 전화통을 붙잡고 듣기 거북한 말을 담아 소리를 냅다 지르는 게 일상이 됐다. 수화기 너머 인사는 시중은행 임원들이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향해 속절없이 줄어드는 위기 상황에 시중은행들도 나서달라는 읍소 겸 협박(?)이었다. "제발 구제금융만은 피해야 한다." 호통을 치느라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는 이제는 듣기 거북해진 '관치 금융'의 선봉장 역할을 떠맡았다.
관치는 아니더라도 민관을 독려하고 정치권과 긴밀히 협의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 필요하다. 먹고사는 데에는 여야가 없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정치가 제아무리 경제를 쥐고 흔드는 형국이라고 해도 경제 없이는 정치도 없다. "누군가 나서서 우리 경제를 뒤흔드는 지금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룹 계열사 대표의 한숨이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