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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교육]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살아있는 역사책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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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필 기자

승인 : 2013. 03. 17. 13:00

[희망100세] 방송통신대학교 최고령 학위취득자 81세 정태은씨 인터뷰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 전쟁과 분단,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국사책에서 배운 한국 근현대사를 모두 직접 경험한 사람을 만나기란 이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올해 방송통신대학교 학위수여식에서 최고령 학사학위취득자로 평생교육상을 받은 정태은(81)씨는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도 일평생 배움을 쉬지 않았다”고 자신의 삶을 요약했다.

13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문고 안 카페에서 살아있는 역사책을 만났다.

방통대 최고령 학위수여자 정태은씨가 13일 서울 세종로 사거리에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 조준원 기자 wizard333@asiatoday.co.kr
◇ 마을의 신동, 서당을 거쳐 서울로

그의 역사는 82년 전 페이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2년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장전리에서 소작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정씨는 어려서부터 영특해 마을사람들의 관심과 기대를 받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6남매 형제 중에 내가 딱 중간이야. 큰 누님에 형님 둘, 그다음 밑으로 여동생 둘. 내가 태어난 해에 마을에서 남자아이 14명이 같이 태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어렵기로 따지면 우리 집이 최고로 어려웠지. 그때는 일제가 쌀이란 쌀은 다 가져가는 바람에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풀을 뜯어 먹을 정도로 가난했어. 흔히들 ‘찢어지게 가난했다’고들 하는데 그 표현도 약하다고 느낄 정도니까 오죽하겠어. 그래도 아버님께서 자식 중에 한 명이라도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 형제 중에 머리가 좋았던 나를 국민학교에 보내셨어.”

한 마을에서 태어난 동갑내기 친구들과 같이 자라면서 공부만큼은 절대로 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이를 악물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집에서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 혼자 공부를 하면서 저녁에 졸음이 오면 밖으로 나가 얼굴에 냉수를 부었다. 겨울에는 눈밭에 뒹굴면서 밤새도록 공부를 했다. 배는 늘 곯았지만 그럴수록 정신은 점점 더 강하게 무장돼갔다.

“국민학교를 졸업했지만 결국 가난 때문에 중학교로 올라가진 못했어. 방법을 궁리하시던 아버님은 나를 마을 서당으로 보내셨지. 거기서 명심보감, 소학, 대학, 논어 등을 1년 정도 배우니까 훈장선생님이 ‘논리가 터졌다’고 말씀하시더라고. 마을에서는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어. 그때 배운 한자는 지금도 안 까먹어.”

8.15 광복이 찾아오고 살림살이는 조금 나아졌지만 소년은 늘 공부에 배고팠다. 서당에 다녀도 더 큰 배움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열여섯 살이 된 소년은 정부중앙청사에 다니는 나이 많은 조카뻘 친척에게 서울로 올라가도 되겠느냐는 편지를 썼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길로 가방을 싸고 서울행 기차를 탄 그는 친척이 살고 있는 서울 서대문 행촌동 자취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친척의 소개로 중앙청 급사 자리에 임시직으로 일하면서 야간 양정중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병행했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자리가 잡혀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6.25 전쟁이 터졌다.

◇ 전쟁 후 막힌 인생, 고향 뒷동산에서 통곡의 기도

“6.25 사변이 터져 서울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 피난을 가다가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그때쯤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됐어. 고향마을 연산중학교에서 졸업을 하고 18살에 해군으로 들어갔지. 진해로 내려가서 군복무를 했는데 내가 가톨릭 신자거든. 김수환 추기경의 친형님도 신부님이신데 그분이 당시 우리 부대에 군목으로 계셨어. 그분 밑에서 군종병으로 일하면서 저녁에 시간이 나더라고. 좋은 기회잖아. 평소에 늘 하고 싶었던 영어공부에 매진했지.”

3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청년은 제대 군인을 대상으로 한 직업훈련소에 들어가 배움의 길을 이어갔다. 그곳에서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 진로를 고민하던 중에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고향으로 달려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끝내 막내아들을 못보고 하루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형님들은 나보다 늦게 입대해 둘 다 군에 있었어. 장례를 치르고 나니 늙으신 어머니와 형수에, 조카에... 떠날 수가 없는 거야. 서울에 취직자리가 생겨 올라가기로 약속해놨고, 공부도 이어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사회진출도 공부도 모든 게 다 순식간에 막혀버렸지. 식구들은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2년간 농사를 지었지. 팔자려니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양계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양계장을 만드는데 마을 노인이 찾아왔어. ‘자네 뭐하고 있나.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 어서 서울로 올라가게’라고 호통을 치시더라고. 촌동네에 영특한 신동이 났다고 해서 다들 나한테 거는 희망이 있었거든.”

정신이 번쩍 들어 대전으로 가 사방팔방으로 기업체의 취직자리를 알아봤지만 중졸학력의 그를 써주는 곳은 없었다. 하릴없이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은 농사를 짓고 양계장을 운영했다. 겨울이 찾아와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성호를 긋고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나는 거야. ‘아니,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면서요. 제 길이 이렇게 막혔는데 길 좀 틔워주세요. 인생이 이게 뭔가요, 네? 길 좀 뚫어주세요, 주님!’하면서 펑펑 울었지. 평생에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을 거야.”

◇ 공무원 진출, 시대 흐름에 사표 던져

한 달 뒤 기적이 일어났다.

“시골마을 5일장에 갔는데 군복무를 같이한 친구를 우연히 만난 거야. 반가운 마음에 장터에서 순대안주에 막걸리를 마시는데 이 친구가 지금 뭐하냐고 물어 농사짓고 양계장한다고 했지. 그러니까 자기가 아는 높은 분을 소개시켜주겠다는 거야. 경찰국의 간부 출신인데 이분한테 내 사연을 담은 장문의 편지를 썼어. 감동을 하셨는지 바로 오라고 하시더라고.”

동네 처녀와 결혼한 25살의 그는 부인과 함께 대전으로 가 시청에서 일을 시작했다. 안정을 찾고 공부도 병행하며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자유당 부패로 4.19가 일어나면서 장면 정권이 들어섰어. 5개년 경제계획이 나오면서 먹고 살만해졌지. 그러다 5.16이 터진 거야. 전반적인 공무원 세대교체가 되면서 죄다 군 출신들로 공직자리가 채워졌지. 내 자리도 예외는 아니었어.”

격동하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또다시 일자리를 잃게 된 그는 한 번 더 머리띠를 졸라맸다. 공부로 실력을 키우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행정고시를 준비한 그는 5급 공무원 채용시험에 응시해 당당하게 합격했다. 그리고 지금의 국가보훈처인 군사원호청에 1961년 창설멤버로 들어가 공직생활을 이어나갔다.

“서당에서 배운 한문이며 군복무 때 익힌 영어며 아무튼 실력은 있었으니까 뽑혔을 거야. 공부한 게 어디로 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처음에 대전지청에서 근무하다가 전국의 인재를 뽑는 과정에서 전근 발령이 났어. 서울로 차출됐지. 그런데 승진이 안 되는 거야. 학벌과 간판을 따지는 상황에서 중졸에 고시출신은 찬밥이었지. 당구나 치고 노는 장교출신과 명문대출신들이 진급하더라고. 난 늘 말단이었지.”

◇ 사업 대성공, 소년시절 학생으로 돌아가 마지막 꿈 좇아

방통대 최고령 학위수여자 정태은씨가 지난달 서울 종로구 대학로 방통대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증서와 상장을 들고 브이를 그리고 있다. /사진=방통대제공
어느덧 5남매의 자녀를 둔 중년이 된 그는 월급만으로 도저히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없게 되자 결심을 했다. 마침 사업을 같이 하자는 고향친구의 제안도 받은 터였다. 공직생활을 접은 그는 1975년 고향으로 돌아와 자개 사업을 시작했다.

“친구하고 사업을 벌였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 주어진 최고의 기회였지 싶어. 그동안 굴곡 많은 인생을 잘 버텨온 보상이었는지. 당시에 자개장이 대유행하면서 값이 올라갔는데 우리가 자개를 미리 대량으로 확보해 놨었거든. 자개가 품절로 동이 나면서 전국 농방의 사장들이 우리를 찾아왔어. 우리는 물량을 한 번에 풀지 않고 조금씩 풀면서 돈을 그야말로 엄청나게 벌었지. 그때 번 돈으로 자식들 다 키우고 지금까지 산다니까.”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난 그에게 남아있는 한 가지 아쉬움은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한이었다. 사업과 자녀 뒷바라지에 공부할 틈이 없었던 그의 머리에는 어느덧 흰서리가 내려있었다. 자녀들이 장성해 출가한 뒤 그는 다시금 못 이룬 꿈을 좇았다.

“이화여대 평생교육원에서 2003년부터 5년간 노년학을 배웠어. 학점은행제로 학위를 따려는데 내가 중졸이라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거든. 검정고시를 쳤는데 수학이 과락인 거야. 다른 건 다 하겠는데 수학은 기초가 없으니 어렵더라고. 이거 야단났잖아. 수소문을 해보니 서울 강서구에 있는 성지고등학교는 일반이 아닌 실기과정이 있다더라고. 거기서 2008년에 졸업장을 받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학과를 전공했지. 여든 넘어서 학사모를 쓰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학위수여식에서 평생교육상을 받은 그는 다시 방통대 문화교양과 2학년으로 편입해 강의를 듣고 있다. 주위 동년배들이 ‘정 사장, 이 나이에 뭐한다고 대학을 다니나. 편하게 쉬다가 가면 그만이지’라고 말하면 그저 빙그레 웃는다. 인생에서 경험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담은 자서전 성격의 시집을 내겠다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게 배운 만큼 알고, 아는 만큼 생각할 수 있잖아. 지금도 공부하면서 새로운 걸 알게 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어. 삶이란 게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기 전까지 배우는 거지. 종로에 할 일 없이 다니는 동년배들을 보면 인생의 목표를 가지라고 말해주고 싶어. 심지어 나보다 훨씬 젊은 60대, 70대들도 탑골공원에서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 꿈을 이루기 위해 배우고 익히는 게 인생 아니겠나.”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촬영을 하자 손으로 ‘브이’를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그는 여전히 청춘이었다.

 
이정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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