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팔이 19일 서울 장안동 한 체육관의 링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조준원 기자 wizard333@ |
아시아투데이 조한진 기자 = 주먹 하나로 세계를 평정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주인공이었고 큰 ‘명예’도 누렸다. 남부럽지 않은 ‘부’도 쌓았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 과거를 뒤로하고 박종팔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지난달 ‘박종팔 복싱 다이어트 스쿨’을 열고 다시 사각의 링 옆에 섰다. 20여년 만에 땀 냄새 가득한 체육관으로 돌아온 박종팔은 “지금이 내 인생의 3라운드”라고 했다.
지난 19일 서울 장안동에 위치한 체육관에서 만난 박종팔의 모습은 선수 시절을 연상시켰다. 건장한 체격에 상고머리, 트레이닝복 차림의 박종팔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재치 있는 언변으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라운드 1’ 무안 촌놈에서 복싱 영웅으로
박종팔은 한국 복싱이 배출한 불세출의 스타다. 1977년 11월 프로에 데뷔해 쾌속 질주를 거듭했다. 이듬해 한국챔피언이 됐고, 1979년에는 동양챔피언에 등극했다. 이후 1984년에는 국제복싱연맹(IBF) 슈퍼미들급 챔피언에, 1987년에는 세계권투협회(WBA) 슈퍼미들급 챔피언 벨트까지 허리에 둘렀다. 지난해에는 IBF로부터 ‘IBF 30년을 빛낸 복서’로 선정돼 특별상까지 받았다. 박종팔의 프로 통산전적은 46승(39KO) 5패 1무다.
“전남 무안 촌놈이 봇짐 짊어지고 올라와서 정말 성공했죠. 중학교 2학년 때 유채 2가마를 몰래 판 돈 1만4000원을 들고 서울에 왔어요. 그때 기차표 값이 600원인가 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서울역앞 물방개 도박에서 1만3000원을 날렸어요.(웃음) 나중에 집 나온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영등포역으로 쌀을 보내주셨어요. 그 때 복싱 도장이 눈에 띄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어요.”
선수 생활 초반 박종팔은 힘과 주먹만을 앞세우는 스타일이었다. 한일 신인왕 교류전에서 일본 선수를 26초 만에 KO시킬 정도로 자신의 ‘한 방’을 믿었다. 그러나 첫 한국타이들 도전에서 강흥원에게 혼쭐이 난 뒤 복싱에 새롭게 눈을 떴다.
“처음에 복싱은 힘과 주먹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어요. 강흥원 선배에 지고 난 뒤 복싱이 힘과 주먹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 때부터 기술을 죽어라 연마 했죠. 결국 그 때 선배한테 진 게 약이 된 것 같아요. 계속 힘으로만 밀었으면 세계챔피언은 힘들었을 거에요.”
박종팔이 샌드백을 때리고 있다. /조준원 기자 wizard333@ |
박종팔은 선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돈을 모았다. 대기업 사원의 월급이 15만원 정도 하던 1980년대 초 박종팔의 파이트머니는 1500만~3000만원 수준이었다. 1986년 미국 원정에서는 1억5000만원까지 받았다. 박종팔은 1988년 은퇴할 때 90억원 규모의 재산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마르지 않을 것 같던 곳간은 어느새 텅텅 비어 있었다.
“뒤통수를 많이 맞았죠. 은퇴하고 1994년에 동아프로모션을 인수했어요. 그런데 협회에서 사업약속을 지켜주지 않아 피해를 봤죠. 4억원 정도 손해 본 것 같아요. 이후에 주변에서 ‘술집을 하면 사회를 배운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강남에 술집을 냈죠.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됐어요. 그런데 외상을 많이 주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외상값 500만원을 3000만원짜리 어음으로 받고 2500만원 거슬러 주는 식이었거든요. 나중에는 어음, 당좌수표 30여장이 다 부도가 나더라고요.”
한때 박종팔은 땅 부자로 유명했다. 권투로 번 돈으로 전국 각지에 땅을 사 모았다. 박종팔은 “나중에는 어디에 내 땅이 있는지 잘 모를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나 술집을 하면서 하나, 둘씩 팔아 빚을 갚았다. 결정적으로 부동산 시행 사기에 말려들어 빈털터리가 됐다.
“한 방을 노리는 사람들이 주변에 붙었어요. 고수익을 보장한다는 부동산 시행 사업을 하자는 유혹이었죠. 송도·일산·분당 등 여기저기 쫓아 다녔어요. 그때는 하도 많이 돈을 날리니까 1억~2억원은 양에도 안 차더라고요. 한 방으로 찾으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됐죠. ‘권투에서는 한 방이 있었지만, 인생에서는 한 방이 없다’는 그때 걸 알았어요.”
◇‘라운드 3’ 새롭게 찾은 ‘희망’… 다시 ‘돈팔이’ 로
박종팔은 한때 극단적인 생각을 품었었다. 사업 실패 후 뇌졸중과 당뇨 등으로 몸과 마음 모두가 피폐해 있었다. 스스로 마침표를 찍기 위해 경기도 남양주 수락산의 바위까지 점찍어 놓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의 부인인 이정희씨를 만나고 삶이 바뀌었다.
“2000년부터 7~8년 동안 수락산에서 죽을 생각만 했어요. 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저기도, 여기도 우리집이었는데’라는 푸념을 많이 했죠. 그때 친구 사무실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의 부인을 만나고 ‘인생 3라운드’가 시작됐죠. 부인이랑 2008년부터 수락산에서 터를 잡고 식당을 했어요. 당시에는 저의 몸냄새를 스스로가 못 맡을 정도로 몸이 망가졌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박종팔은 부인 이씨에게 언제나 고마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이제 가정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됐다. 전에는 내 멋대로 살았는데 이제야 깨우쳤다. 50이 넘어 철이 들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씨는 “처음에는 양복을 입고 번지르르하게 나타나 몰랐다”며 “(박종팔과)재혼할 때는 손잡고 여행만 다니면 되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박종팔은 한국 복싱에 또 다른 희망을 보고 있다. 오랜 침체기에 빠져있지만 체육관 숫자는 오히려 늘었다고 했다. 스타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종팔은 다시 ‘돈팔이’ 소리를 듣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돈팔이’는 박종팔의 별명이다. 세계타이틀 매치를 앞두고 그의 스승이 ‘잘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면 돈을 많이 버는 ‘돈팔이’가 되고, 아니면 ‘똥파리’가 된다’고 한데서 유래됐다. 선수 시절 돈을 긁어모았던 ‘돈팔이’처럼 지도자로서도 성공하고 싶은게 박종팔의 마음이다.
“모든 종목이 그렇잖아요. 권투에도 스타가 있어야해요. 어느 체급이 됐던 챔피언이 다시 나와야 붐이 제대로 일어날 것 같아요. 권투계도 하나로 힘을 모아야 하고요. 제가 다시 권투판에 발을 담갔잖아요. (챔피언)하나 만들어 봐야죠.(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