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한 공무원도 “양안관계의 성과는 어떠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쉽게 단절되지 않고 민간교류를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남북관계도 경제교류를 우선 추진해야 하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만 기업의 대 중국 진출, ‘경제는 정치와 무관’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과 대만의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은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채택한 1979년 이래 어떠한 정치상황에서도 민간교류를 계속 이어왔기 때문에 양국 수뇌들의 회담 없이도 실질적인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초기 대만의 중국 투자는 간헐적이었지만 1987년 대만 정부가 대만 주민의 중국내 친척방문을 허용하고 그간 강력하게 통제하던 외환 분야도 상당수준 규제를 완화해 대만기업들의 대 중국투자 공간을 어느 정도 마련해 주면서 투자는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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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대만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 등 내부적 요인 및 선진국의 보호무역주의, 환율 인상 때문에 거대시장인 중국을 강력히 필요로 했기 때문이며 이런 이유로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대 중국 투자는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1993년 대만 기업의 대(對) 중국 투자확대를 우려해 대만정부가 동남아로의 공장이전을 강력하게 권유했던 ‘남향정책(南向政策)’도, 대기업과 첨단기술의 중국진출을 규제할 목적으로 시작한 ‘제지용런(戒急用忍:중국과의 교역을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자) 정책’도 거세지는 대만의 대중국투자의 흐름을 막지 못했다.
1999년 리덩후이(李登輝) 당시 총통의 미국 방문과 양국론(兩國論:중국과 대만은 특수한 국가 대 국가 관계) 주장에 양안 정치계는 크게 소용돌이 쳤지만 대만의 대 중국 투자는 감소하지 않았다.
2000년 완전한 대만의 독립을 주장하는 천수이볜 총통의 당선으로 양안교류가 흔들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가입으로 중국 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자 대만 상인들은 이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중국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이러한 장기간의 경제교류는 상호간의 신뢰와 이해를 낳으며 사회적 교류로 이어졌고 이는 정치적 대화를 가능케 하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고 양안관계 전문가들은 언급하고 있다.
남북관계, 경제교류만은 이어 가야… ‘중국을 완충지대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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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전문가들은 “남북경협의 중단은 남북한 공동의 불이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이웃 국가들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는 꼴”이라며 “정치·군사 교류는 차치하더라도 경제교류만큼은 이어가며 교류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경제교류가 사회교류와 통합으로, 다시 정치통합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패러다임에서 경제교류마저 끊어지게 된다면 통일논의는 다시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는 심각한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남북관계 보고서에서는 "양안이 홍콩을 정치적 완충지대로 활용했듯이 남북한도 중국을 활용해야 한다”며 “남·중·북 3국의 교류는 쌍방의 균형이 상실되더라도 다른 한쪽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방안은 분단상태가 지속될 수 있다는 리스크를 안고 있지만 적어도 현재와 같은 극단의 상황으로 남북한이 그간 이뤄놓은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재 북한과 중국은 북한 경비대의 중국인 총격사건 이후에도 교류를 지속하며 서로를 향한 경제협력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지난달 11일 이학성 신의주시 책임서기 등 일행은 총격사건이 발생한 직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을 방문해 샤더런(夏德仁) 당서기 등 다롄(大連)시 정부관계자들을 만나 경협 방안을 논의했으며, 류홍차이(劉洪才) 주 북한 중국대사는 이에 앞서 평양에 주재하는 중국기업 대표들을 불러 북·중 경협 확대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핵심은 북한의 태도에 달렸다. 이는 양안교류에서도 보듯이 상대적으로 우세에 있는 일방(한국)이 적극적으로 교류협력을 추진하려 함에도 방어적 입장에 있는 일방(북한)이 오히려 교류의 속도와 범위를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