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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사이트] 연고 이전 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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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2. 25. 14:08

축구에도 역사해석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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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2일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벌어진 FC서울과 FC안양의 '연고 이전' 더비. FC서울의 주장 린가드가 후반 초반 선취골을 넣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프로축구연맹
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선임 기자 = 지난 22일 열린 K리그1 FC서울과 FC 안양의 경기는 역사적이다. 경기의 중심에 '역사 논쟁'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연고지 논란'이다. 보통은 도시명 뒤에 FC(Football Club)을 붙이지만, 안양은 FC서울을 의식해 팀명을 'FC안양'으로 명명했다. FC안양 팬과 관계자는 이 문제에 민감하다. 그들을 '안양FC'으로 부르는 건 큰 실례다. 팀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84년 창단한 FC서울은 K리그1에서 통산 6차례 우승을 차지한 명문 구단이다. 그렇다면, 2013년 창단 후 2025년 시즌 처음으로 1부리그 무대를 밟은 안양은 왜 FC서울을 향해 끊임없이 '도발'하는가.

럭키금성 황소는 창단 후 1989년까지 대전광역시와 충청도가 연고였다. 국가대표팀의 간판이자 '포항의 별' 최순호를 '청주 출신' 프렌차이즈 스타라며 영입할 정도였다. 1986년까지는충청도 각 지역을 돌며 순회 경기를 했고 1987~1989년에는 지금은 사라진 대전 한밭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썼다. 한밭운동장은 1968년 예비군 창설식이 열리는 등 수많은 역사적 이벤트가 열렸던 장소다. 현재는 야구장으로 리모델링, 3월 5일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라는 이름으로 재개장한다.

럭키금성 황소는 1990년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다. 그해부터 광역 연고제가 도시연고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화 천마(현 성남FC), 유공 코끼리(제주 SK FC) 3팀이 서울을 선택, 1995년까지 동대문운동장을 공동 사용했다. 일정이 겹치면 가끔 목동에서도 경기했다.

사태가 급변한 건 1996년이다. 2002년 FIFA 월드컵 유치를 위해 정부와 대한축구협회가 '지방 축구 활성화'라는 대의명분을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여러 도시에 프로 구단이 있어야 유치에 유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시행한 제도가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다. 기존의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들인 일화 천마는 천안으로, 1991년부터 LG 치타스로 팀 이름을 바꾼 럭키금성 황소는 안양으로, 유공 코끼리는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했다. 사실상의 강제 이전이었다. 그 후로 8년 동안 K리그엔 서울 연고 프로축구단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큰 시장에서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안양 LG 치타스(1996~2003)는 1996년 안양종합운동장으로 터전을 옮겨 2003년까지 활동했다. 최용수, 이영표, 이영진 등이 안양 시절의 유명 선수다. 안양 LG는 2004년 2월 서울로 연고지를 옮겼다. 팀 명칭도 'FC서울'로 바꿨다. 안양 팬들이 배신감을 토로하는 대목이다. 이 '연고 이전'에도 사연이 있다. 2002년 월드컵 성공적 개최 후 상암에서 프로축구 흥행을 견인할 팀이 필요했다. 상암월드컵 경기장 건설에 대한축구협회가 부담한 분담금은 150억원(250억원에서 100억 탕감). 축구협회는 상암경기장 입성팀은 150억을 내고 들어와야 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장기적으로 2팀을 유치해 각각 75억 원씩 분담하는 것으로 조건을 완화하고 협회는 FC서울의 연고 이전을 승인했다. 만년 적자사업인 프로축구에 '75억의 건설분담금'을 일시불로 내고 서울로 연고이전하는 것은 무리라는 여론이 회사 안팎에서 끊이지 않았지만, FC서울은 '한국 축구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상암 경기장을 연고로 삼은 구단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리로 총대를 맸다. 장기적 적자 누적이 뻔하지만, 한국축구판 전체의 흥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였다. FC서울이 대승적 견지에서 희생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렸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팀이 없어진 안양시는 강력 반발했다. 시 의회에서 여러 차례 창단 계획이 반려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2013년 시민구단 FC안양을 창단했다. 안양은 지난해 K리그2 우승을 차지하며 드디어 K리그1로 승격해 서울과 만나게 됐다. '창단과 승격의 이유는 오직 FC서울과의 맞대결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팬들의 포효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두 팀의 첫 K리그1 맞대결은 경기 외적으로도 큰 화제를 모았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K리그1 역대 홈 개막전 최다 관중 2위 기록인 41,415명의 대관중이 운집했다. 5,304명의 안양 원정팬을 포함한 숫자다. 결과는 린가드와 루카스의 연속 골을 앞세운 서울의 2-1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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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석을 가득 메운 FC서울 팬들./ 사진=전형찬 기자
이 경기의 의미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역사 논쟁이다. 두 구단 사이에 얽힌 역사를 이해하지 않으면 이 미묘하게 격정적인 분위기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 하나의 제도가 그 사회에서 확고하게 뿌리내렸다는 증명은 '자체 역사의 수립 및 유통'이다. '축구역사'를 뜻깊게 받아들이고, 소비하며 해석하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축구라는 제도가 그만큼 튼튼하게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는 반증이다. 축구역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축구역사는 축구 밖으로 나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둘째, 역사 해석의 논쟁. FC서울의 김기동 감독은 'FC안양의 모태가 된 팀이 고양 국민은행인데, 해체한 팀을 인수 재창단한 것과 같다지만 같은 논리라면 그건 고양에서 안양으로 연고 이전한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이 발언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FC서울의 연고 이전 경위에 대한 객관적 사실에는 어느 누구든 이견이 없다. 당대의 일이며, 현재와 멀지 않은 시절에 벌어진 일이고, 객관적 사실의 진위에 대한 다툼이 없는데도, 각자 입장에 따라 해석은 판이하게 갈라진다. 과거사를 재단하는 건 늦게 태어난 자의 특권이다. 특정 사건 후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흘렀는지를 알기에 우리는 역사적 인물의 언행에 대한 평가를 '비교적 쉽게' 내린다. '당대 바로 그 순간'의 고민을 고려하지 않는다. 어쩌면, 역사 해석은 그래서 '늦게 태어난 자의 특권'이라기 보다 '늦게 태어난 자의 오만'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FC서울과 FC안양의 역사 논쟁은 한국 프로축구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식의 의미부여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축구가 성숙기로 진화해 간다는 표상이다. 두 팀의 '연고 이전 더비' 다음 경기는 5월 6일 19시 안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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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남쪽 응원석을 채운 5,304명의 FC안양 팬들./ 사진=전형찬 기자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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