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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스포츠人] “아직도 첼시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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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2. 22. 20:43

거스 포옛 전북 감독 심층 인터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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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포옛 전북감독(왼쪽)과 장원재 선임기자./ 사진=전형찬 기자
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선임 기자 = 거스 포옛은 1997년 스페인의 레알 사라고사(1990~97)에서 EPL 첼시로 이적했다. 첼시(1997~2001) 토트넘(2001~2004)에서 활약했으니 스페인에서 7년, 런던에서 7년을 보낸 셈이다. 첼시에서 거스 포옛은 컵위너스컵(1997/98), UEFA 수퍼컵(1998), FA컵(2000), 커뮤니티 실드(2000) 등 4개의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 소환했다.

- 네덜란드의 별 루드 굴리트가 1995년 첼시로 왔고, 96년부터 98년까지 선수 겸 감독으로 활동했다. '섹시풋볼'이 구호였다. 지안루카 비알리, 조지 웨아, 이타적인 플레이어 지안프랑코 졸라까지 멤버가 어마어마했다.

"로베르토 디 마테오, 마르셀 드사이, 하셀바잉크, 디디에 데샹, 나이지리아의 바바야로 등 다국적군이었다. 보즈만룰 적용 이후 가장 국제적인 팀이었을 거다. 그레암 르 소도 기억한다. 프랑스계 이름같지만, 그는 영국인이다, 하하. 그런데 제 룸메이트가 누구였는지 짐작하나."

- 전혀. 누구였나.

"첼시 시절 내 룸메이트는 1년 전에 전주에 살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다. 루마니아 출신의 미드필더 댄 페트레스쿠다."

- 2023년 시즌 도중 부임해 지난 시즌 중반에 사임한, 전북의 감독이었던 분 말인가.

"맞다. 그가 제 룸메이트였다. 놀랐나. 정말 엄청난 우연의 일치다."

- 믿을 수 없는 우연이다.

"정말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다. 댄은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제가 첼시에 갔을 때(1997/98 시즌) 댄은 저보다 두 해 먼저 그곳에 와있었다. 그리고 2000년에 첼시를 떠났다. 저는 2001년까지 첼시에 머물렀다. 그래서 첼시에서의 제 마지막 시즌 룸메이트는 다른 선수였다. 댄은 브래드포드를 거쳐 사우샘프턴으로 이적했다. 제 평생의 친구다."

- 평생의 친구 룸메이트 둘이 전북 감독에 부임한 건가.

"저 자신도 믿을 수 없다. 정말 엄청난 우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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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시절의 거스 포옛./ 사진=첼시FC
- 첼시가 2000년 FA컵에서 우승했을 때, 크게 감동했다. 경기 직후 디 마테오의 인터뷰를 듣고다. '제 여동생은 시각장애인이다. FA컵 결승전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어서 오늘 경기장에 초대했다'라고 했다.

"아름다운 인터뷰였다. 디 마테오도 제 평생의 친구다. 지금도 끊임없이 연락한다."

- 2000년 5월에 열린 제119회 FA컵 결승전은 구 웸블리경기장에서 열린 마지막 결승전이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특별한 순간이었다. 결승전이 끝난 후, 그 경기장은...해체되고 새로운 웸블리 경기장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지금 모두가 알고 있는 새 웸블리 경기장이다."

- 축구의 성지라 불리는 유서깊은 경기장의 마지막 공식 경기에 나섰던 심정은.

"팀 미팅 때 오리지널 웸블리 경기장에서 열리는 마지막 FA컵의 우승자가 꼭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로베르토 디 마테오가 득점해서 우리가 이겼다. 1-0으로 아스턴빌라를 물리쳤다. 처절했던 경기였다. 경기 내용은 좋지 않았지만, 아무도 경기 내용을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겼다. 경기 끝! 잘 가 아스턴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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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FA에서 우승한 첼시 선수단./ 사진=첼시FC
- '마지막 결승전'이라 그 경기 열기가 정말 대단했다.

"그때 우리가 아주 좋은 추억을 만든 것도 잊을 수 없다. 깜짝 이벤트였다."

- 뭔가.

"베스트 일레븐 중 중 유일한 영국인이었던 주장 데니스 와이즈가 아이디어를 냈다. 경기장 관리인의 사전 허락받지 않고, 경기 후 아이와 가족을 모두 피치로 불렀다.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서 가족, 아이들과 승리를 자축했다. 웸블리에서 유일했던 축하 행사였다. 나중에 FA로부터 공문을 받았는데, 안전상의 이유로 가족을 피치로 부르는 행사를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더라. 우리는 이듬해 차리티 실드 슈퍼컵에서도 우승했다."

차리티 실드컵은 잉글랜드의 시즌 개막전이다. 전년도 EPL 우승팀과 FA컵 우승팀이 웸블리에서 단판 승부로 자웅을 겨룬다. 공식 리그 개막 일주일 전에 경기하며 수익금은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기에 이런 명칭으로 불린다.

"차리티 실드컵 때는 아이들을 피치로 데려올 수 없었다. 정보가 샜는지(?), 벤치 앞에 경찰이 서 있더라."

- 2000년 결승전이 끝나고 첼시의 모든 선수가 아내, 자녀와 피치 위에서 서로 축하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저도 웸블리에서 두 아이와 함께 FA컵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가 그렇게 했다. 좋았던 시절이다. 첼시에서 컵 위너스 컵 우승(1997/98), 레알 마드리드와의 슈퍼컵(1998)에서 승리했고 FA컵이 제 마지막 트로피였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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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우승컵을 가운데 두고 찍은 거스 포옛의 가족사진. 이 어린이 중 한 명은 현재 전북에서 전력 분석관으로 일하고 있다. / 사진제공=거스 포옛
- 가수로서의 운은 어땠나.

"가수라니? 무슨 얘기인가? 전 노래 못한다."

- 정식 CD도 발매했다. '첼시! 첼시!'라는 공식 응원가다. 선수단 전원이 '가수'로 참여했다.

"오, 제발..."

- 당신이 불렀던 대목을 기억한다. 한참 가사가 나오고 '첼시! 첼시!'라고 외치는 부분이다.

"그때 저는 영어를 못했다. 팀 관계자가 선수단 전체를 스튜디오로 데리고 가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지금 그 곡이다. 개인적으로는 괴로웠지만 좋은 노래였다. 아직도 유튜브에 나온다."

- '첼시! 첼시!'는 두 번 반복된다.

"거기가 제가 부른 유일한 부분이다."

- 그 대목을 1절은 졸라, 2절은 당신이 불렀다.

"정확하다. 그 부분만 불렀다. 영어로 노래할 실력이 안되니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프로 가수가 세 명 왔고, 잉글랜드 선수들이 노래 대부분을 가수와 함께 불렀다. 나머지는 그냥..."

- 선수단 전원이 노래를 취입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나.

"합창은 노래 마지막 부분에 나온다. 영국에서는 결승전을 치르는 팀에게 그들만의 노래가 필요하다는 전통이 있다. 구단 관계자가 그 말을 우리에게 했을 때 처음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스튜디오에 갔을 때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곤경에 처했다. 정말 곤혹스러웠다."

- 2004년 토트넘에서 일단 은퇴했다가, 2006년 3부리그 스윈던 타운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저는 코치였다. 그리고 우리 팀은 스쿼드가 얇았다. 그래서 이적 시장 마감일을 하루 앞두고 감독인 데니스 와이즈와 코치인 제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선수 등록을 하기로 결정한 거다."

- 플레잉 코치였나.

"그렇다. 하지만 데니스와 나는 한 번도 경기에 출전한 적이 없다. 그래서 스윈던 소속으로 출전 기록이 없다. 제 마지막 공식 경기는 토트넘 소속으로 뛰었던 경기다. 2004년 울베햄튼과의 원정 경기로 기억한다. 그 경기가 프로 축구 선수로서 제 마지막 경기다."

- 스윈든 타운의 감독이었고, 첼시의 주전 선수 중 유일한 영국인이었던 주장 데니스 와이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저는 성격상 새로운 클럽에 갈 때마다 누가 리더인지를 주목했다. 리더를 호위하고 그로부터 배우고 그의 라커룸 통솔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었다. 리더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다. 선수단은 모두가 리더를 따라야 한다. 그래야 한 팀으로서 시너지가 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건 지금도 여전히 매우 중요한 점이다."

- 데니스 와이즈는 진정한 리더였나.

"진짜 리더였다. 독자분이 좋아할 만한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드리겠다. 말해도 괜찮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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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FC의 영원한 주장 데니스 와이즈/ 사진=첼시FC

- 부탁한다.

"우리 팀엔 정말 많은 외국인이 있었다. 그래서 라커룸에선 수많은 언어가 쓰였다.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등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어느 날 데니스가 리더로서 결단을 내렸다. 차에서 내려서 훈련장 문을 통과한 후 훈련장을 떠날 때까지 '영어만 쓴다'라고 선언했다."

- 그 뒤의 결과는.

"두 가지 효과가 있었다. 첫째, 모두가 영어를 더 빨리 배울 수 있게 만들었다. 두 번째는 일체감을 끌어 올렸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어찌 되었든 서로 소통했으니까."

- 그전에는 소통이 없었나.

"있었다. 하지만 언어가 같은 그룹끼리 소그룹 별로 소통했다. 영어로 언어를 통일한 뒤부터 우리는 최고의 팀이 되었다. 그것이 우리 주장의 결정이었다. 규칙을 만든 거다. 아무도 토 달지 않았다. 라커룸에서 다른 언어로 말하면 약간의 벌금을 냈다. 그때부터 우리는 진정한 '한 팀'이었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는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1997/98)했고,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우승(1998)했고, FA컵에서 우승(1999/2000)했고, 차리티 실드에서도 우승(2000)했다. 제 말은, 우리가 제대로 된 축구팀이었다는 거다."

- 확 와 닿는다.

"때로는 누군가가 팀을 위해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있다. 그래서 저는 데니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모두. 그래서 지금도 감사한다."

- 당신의 이전 동료 중 한 명이 자기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다(제25대 라이베리아 대통령. 2018.1~2024.1).

"라이베리아의 조지 웨아다."

- 1995년 올해의 세계 최우수 선수다.

"맞다. 2000년 임대 선수로 왔다. 우리에게는 매우 특별했다. 팀에 새로운 선수가 들어 온다고 하면 누가 오는지, 어디서 오는지 묻는다. 조지는 AC 밀란에서 뛰고 있었는데 뉴스를 듣고 바로 든 생각이 있다. '와우, 내가 그와 함께 뛸 수 있는 특권을 누리다니!' 그는 우리가 FA컵 우승에 크게 공헌했다. 준결승에서 제 골을 어시스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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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시절의 조지 웨아./ 사진=첼시FC
- 경기장 밖에선 조지 웨아는 어떤 인물이었나.

"제대로 된 사람이다. 특별한 사람이고 항상 착하게 행동했다. 최고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언행에 품격이 있었다. 다른 축구 선수 중 누군가가 자기 나라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될 가능성이 있냐고 제게 묻는다면 전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말할 거다. 하지만 조지는 달랐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만한 성격과 품격이 있었다. 축구 선수가 대통령이 된다는 걸 기대한 적이 없어서 그의 당선 뉴스를 듣고 조금 놀랐지만, 제가 아는 조지는 그렇게 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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