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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스포츠人] “”995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생애 최고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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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2. 22. 20:39

거스 포옛 전북현대 감독 심층 인터뷰 1
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선임 기자 = 개막 후 3연승이다. 지난 13일 아시아챔피언스리그 2 태국 원정전 포트와의 방콕 경기를 4-0으로 이겼고 16일엔 전주에서 김천을 2-1로 잡았다. 20일 포트와의 홈 경기도 무난히 승리했다. 시즌 극초반이기는 하지만, K리그 구단 중 최고의 순항이다. 강등이라는 유령이 배회하던 전주성에 승리의 DNA를 다시 이식한 남자. 구스타보 아우구스트 포옛 도밍게즈(57)와의 심층 인터뷰를 분재해서 싣는다. 1부는 1988년 데뷔 후 우루과이, 프랑스, 스페인에서 활약하던 시절과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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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거스 포옛 감독(왼쪽)과 장원재 선임기자./ 사진=전형찬 기자
거스 포옛은 우승컵과 인연이 많다. 첫 메이저 트로피는 1994/95 시즌 컵 위너스 컵이다. 스페인 리그 레알 사라고사 시절(1990~1997)이다. 그 시절엔, 각국의 우승팀이 유러피안 컵, FA컵 우승팀이 컵 위너즈 컵에 참가했다. 리그 실력에 따라 1~4장의 출전권을 배분해 각국 상위리그 팀끼리 격돌했던 UEFA컵까지가 3대 메이저트로피로 불렸다.

- 컵위너즈 컵 결승에서 나온 놀라운 장거리 슛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득점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모로코 출신 선수였다.

"나힘이다. 하프라인 넘자마자 바로 슛을 날렸다. 기가 막힌 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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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컵위너스컵 결승전 포스터./ 사진=사라고사 구단 홈페이지
- 우승 당시의 느낌은.

"제 축구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중요한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우리 레알 사라고사는 우승 후보가 아니었다. 스페인에서도 빅 클럽이 아니었는데 유럽 챔피언에 올랐으니까 정말 대단했다. 결승전 마치고 우리가 사라고사로 돌아왔을 때는 시 전체가 용암처럼 끓어 올랐다. 다시 오기 어려운 순간이다."

- 결승전 당시 흰색 상의와 하늘색 하의를 입고 있었다.

"맞다. 정말로 잊을 수 없는 경기, 매우 기억에 남는 경기다. 5월 10일 파리의 파크 데 프린스 경기장이었고 상대는 아스날이었다. 나힘이 슛할 때 바로 그 뒤에 제가 있었다. 아스날의 골키퍼가 잉글랜드 국가대표 데이빗 시먼이었다. 누군가가 연장 후반 그것도 119분 50초에 하프 라인 근처에서 슛을 날려 골을 넣고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다? 만화 같지만,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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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컵위너스컵 우승팀 사라고사./ 사진=사라고사 구담 홈페이지
- 프랑스에서 정식 프로 선수로 데뷔했다.

"아니, 데뷔는 10대 때 우루과이에서 했다. 그런데 우루과이 리그는 어떤 면에서는 본격적인 프로리그가 아니다. 준프로다. 저는 우루과이 1부 리그에서 뛰고 있었다. 그런데 구단 차가 아니라 버스를 타고 경기장에 갔다. 프로축구 선수가 버스를 타고 경기장에 간다는 걸 믿을 수 있나?"

- 차량 사정이 좋지 않았나 보다.

"요즘 프로 선수치고 자기 차 없는 사람이 누가 있나? 다들 자기 차가 있지만, 그때는 저희 팀에 3~4명의 선수만 자기 차가 있었다. 저는 아주 어렸고 당연히 차도 없었다. 그후 프랑스로 가서 본격적인 프로축구 선수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 프랑스 2부리그의 그르노블 푸트 38(1988~1989)이다.

"제 축구선수 경력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프랑스 그르노블에선 매우 어려운 나날이었다. 20대 초반이었고 무엇보다도 제가 프랑스어를 못했다. 2년 후 우루과이로 돌아와 리버 플레이트 몬테비데오에서 2년을 뛰고(1989~90) 1990년 스페인으로 이적했다. 우루과이에선 78경기 출전에 28골을 득점했다."

- 프란체스콜리, 소사, 폰세카 등 당대에 우루과이 출신 명선수들이 많았다.

"사람들이 자주 묻는다. 함께 플레이한 선수 중 최고는 누구냐고. 제 답은 지안프랑코 졸라다. 콜리도 그중 하나다. 문제는, 콜리와는 단 10게임만 같이 플레이했다는 점이다."

- 이탈리아 사르데냐 출신 지안프랑코 졸라를 말하나.

"맞다. 지안프랑코와 첼시에서 4년을 함께 했다. 그래서 그와의 인연이 프란체스콜리와의 인연보다 더 깊다. 하지만 선수로서 콜리와도 매우 가까웠다. 특히 제 커리어에서 가장 멋진 순간을 프란체스콜리와 함께했다."

- 언제를 말하나.

"1995년 남미 챔피언십인 코파 아메리카 우승이다. 코파 아메리카는 2년마다 열리고, 참가국들의 수준차가 크지 않아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1995년 대회는 조국 우루과이에서 열렸다. 무조건 우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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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코파 아메리카 출전 우루과이팀 공식 사진./ 사진=우루과이 축구협회
코파 아메리카는 1916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으로 출발한 유서 깊은 대회다. 2024년 제48회 대회가 최근 대회다. 아르헨티나가 16회, 우루과이가 15회, 브라질이 9회 우승했다. 1967년까지는 참가팀 전원이 풀리그로 격돌했고, 1975~83년엔 월드컵 예선처럼 홈 앤드 어웨이로 열리다 1987년부터는 한 나라에서 전 경기를 개최했다.

"1995년 우루과이 대회 우승은 우리 의무와 같았다. 1987년 이후 첫 우승 도전이었다. 반드시 우승해야 한다는 압박감, 부담감이 말도 꺼내지 못할 정도였다. 제 인생에서 그렇게 큰 압박감은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절대 없었다. 특히 브라질과의 결승전이 그랬다."

- 7월 22일 결승전은 1-1로 비기고 승부차기까지 가서 우루과이가 5-3으로 승리했다.

"승부차기 하는 순간 모두가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었다. 양 옆 동료들의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모두가 초긴장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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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7. 22. 우루과이 대 브라질의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 사진=우루과이 축구협회
- 우루과이는 1930년 1회 대회, 1950년 4회 대회 이후 월드컵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코파 아메리카도 1995년 이후 아직 우승이 없다. 축구가 바뀌었다. 우리 우루과이는 항상 팬들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했다. 매우 공격적이고 열정적이었지만,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을 개발하지 못했다. 진정한 혁신은 70년대의 브라질이 가져왔다. 그들은 축구 플레이 방식을 많이 바꾸었다."

- 1970년 브라질 대표팀은 20세기 최고의 팀으로 불린다. 펠레, 토스타오, 자일징요가 뛰었다.

"1974년, 1978년 월드컵에서 연속 준우승한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도 현대 축구에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 우루과이가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우루과이는 계속 분투하고 분투하고 분투했지만, 경기력은 세계 최고보다 조금 아래였다. 세계 정상에 가장 가까이 갔던 건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이다. 4위로 대회를 마쳤다."

- 우루과이는 1930년 사상 첫 월드컵의 개최국이다.

"그렇다. 축구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회 대회의 주 경기장이었던 수도 몬테비데오의 100주년경기장(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헌법제정 100주년 기념경기장)은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세계 축구 역사의 상징적인 곳이다. 2030년 월드컵 때 그곳에서 한 경기가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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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비데오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1930년 월드컵 결승, 1995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 등 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경기가 열린 축구의 성지다./ 사진=우루과이 축구협회
- 월드컵 100주년을 기념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너무 작은 나라라서 월드컵을 단독으로 개최할 수 없다. 이제 48개 팀이 참가하지 않나. 우루과이에는 월드컵 관중 수용 시설기준을 충족한 경기장이 부족하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연합 월드컵은 어떤가."

- 당신과 함께 현역 생활 시기가 겹치는 동료들에 대해 알고 싶다. 폰세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다니엘과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는 아주 특별한 친구다. 아주 어렸을 때 그 친구를 만났다. 다니엘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그만큼 그 친구를 잘 안다. 세계 최고 수준의 특별한 선수다."

- 프란체스콜리는.

"프란체스콜리와 다니엘 폰세카는 놀라운 동료였다. 경기장에서 형제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때때로 어떤 선수들은 '자기만의 순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 1995년 코파 아메리카 때 다니엘이 그곳에 있었다. 매 경기 출전하고, 중요한 득점을 올리고 마침내 코파 아메리카 챔피언이 된 건 그에게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을 거다."

- 90년대 선수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우루과이 선수가 하나 더 있다. 인터 밀란에서 뛰었던 레코바다.

"레코바와는 함께 한 경기가 거의 없다. 그는 종류가 다른 선수다."

- 호나우두의 인터밀란에서 데뷔전(1997.8) 때 레코바가 두 골을 넣었다. 경기 후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정말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호나우두 보려고 왔는데 자기가 골을 넣었다고, 그래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게 그의 첫 마디였다.

"그만큼 그는 훌륭한 청년이다. 레코바를 '종류가 다른 선수'라고 평한 이유가 있다. 그는 정말 독특했다. 특히 그의 왼발은 예측 불가였다. 그는 경기장의 모든 곳에서 득점할 수 있었다. 상상이 가나? 어느 지점에서든 슛을 날릴 수 있었다. 심지어 가끔은 코너킥을 바로 득점으로 연결하기도 했다. 저는 그를 잘 안다. 훌륭하고 뛰어난 선수이며 멋진 사람이다."

- 월드컵 예선에서 뛰었지만 본선 출전 기록은 없다.

"1993년 7월에 처음 선발, 2002년 월드컵 예선 두 경기 뛰고 대표팀 캐리어가 끝났다. 그 기간 내내 저는 대표팀에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1998년 예선 첫 네 경기는 주전이었다. 감독이 바뀌면서 마지막 4경기엔 제 자리가 없었다. 제 커리어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말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월드컵 본선 출전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 얼마만큼 아쉬운가.

"인생에서 유일한 아쉬움이다. 모든 선수가 세계 최고의 팀인 레알 마드리드에서 뛸 수는 없다. 그렇다. 모든 사람이 그럴 순 없다. 그래서 불만은 없다. 대신 첼시와 사라고사에서 뛰었으니까. 하지만 월드컵엔 출전하지 못했다. 조금 아쉬운 대목이다."

- 안타깝게도, 당신의 전성기인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우루과이는 예선 탈락한다.

"2002년에 저는 조금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현역이었다. 당시 토트넘에서 뛰고 있었다. 본선에 오른 대표팀에 뽑힐 줄 알았다."

- 후회가 남나.

"아니다. 후회는 없다. 스페인에서 7년, 영국에서 7년을 뛰었고 컵 위너스 컵 우승, 유럽 클럽대항전 우승, 우루과이 대표로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선수였다.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절대 불만 없다. 원하는 걸 다 이룰 수는 없다. 늘 마음 한 켠에 아쉬움이 남는 것, 그것이 인생 아닌가."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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