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칠산 앞바다의 파시는 아직 파(破)하지 않았다’...영광 굴비

기사승인 2021. 09. 2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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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도 반한 짭조름한 진미
천열염 밑간, 행푸으로 식욕 돋워
주요 세입원으로 어업발전 한 몫
어장에 조기때 없어지며 자취 감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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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노릇노릇 잘 구워 짭조름한 굴비의 살점을 떼어 밥 숟가락에 얹어 먹는 맛이야 말로 입맛을 돋우는 밥 반찬이 아닐까 싶다. 조기구이에 무와 칼칼한 고춧가루를 넣어 끓인 조기매운탕 역시 시원한 맛과 얼큰한 맛, 개운한 맛 등 먹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맛으로 표현된다.

국민대표생선이라 불리는 ‘고등어’보다 항상 ‘윗전’인 조기를 떠올리면 역시 전남 ‘영광굴비’다.

지금은 제주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조기를 잡아 판매에 나서지만 천년을 이어온 우리나라 조기의 영원한 고향은 ‘영광’이라고 해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이런 명성의 크기만큼 그 역사와 유래도 깊다. 영광과 굴비의 인연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왔다. 고려 17대 인종(1126)때 이자겸이 난을 일으켜 정주(지금의 영광)로 유배를 와서 소금에 절여 토굴에 돌로 눌러 놓았다가 해풍에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 그 맛에 반했다고 한다.

이후 인종에게 진상하며 비굴(卑屈)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여 보냈다고 한다. 이때부터 말린 조기를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미의 굴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름을 얻기 전에는 소금에 절인 조기를 엮어 매달면 자연스레 구부러지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보고 ‘구비(仇非)조기’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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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는 전라도 곳곳에서 오는 세곡선과 조기를 잡는 배들이 파시를 열면서 법성포를 오갔다. 법성항은 언제나 배들이 북적였고, 조기잡이가 한창인 봄철이면 칠산바다에 조기파시가 설 때면 활기가 넘쳐났다.

조기는 산란철이 되면 영광 칠산바다를 거쳐 연평도로 올라갔다가 가을이면 다시 제주 남쪽바다로 내려가 월동을 한다. 길목에 위치한 칠산바다는 조기의 최적 산란장으로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조기잡이배로 가득했다.

해마다 곡우(양력 4월 20일경)가 되면 칠산 앞바다로 알이 꽉 차고 살이 찐 최상품 참조기인 ‘곡우사리’가 가득했다. 당시 어부들은 칠산바다로 조기잡으러 간다하지 않고 돈 실러 간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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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칠산바다로 돈 실러가세~ 수억만금을 벌어서 우리 청춘 만대라도 먹고살게~ 칠산바다로 돈실러 가세~ 한물거리에 천여동이고, 두물거리에 만여동이 잡혔네. 칠산바다에 뛰노는 조기. 우리네 그물로 다 들어왔네. 지화자 좋다”

이 노랫가락은 칠산바다에서 조기잡이 하면서 부르는 소리로 전해진다. 파시는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와 상인(객주)들 사이에 이뤄지는 시장을 말한다. 만선한 고깃배들은 대개 객주의 근거지로 직행해 처분하나 그럴 시간이 여유가 없을때는 어장 부근 바다 위에서 어획물 매매를 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서해바다 파시는 풍요로움과 경제축의 대명사였다. 특히 흑산도 파시, 전북 위도파시, 경기 연평도 파시는 조기어장의 3대 파시로 유명했다.

칠산파시의 경우 조선시대 중요한 국가 세입원이기도 했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세종실록지리지, 영광군편에 ‘토산(土産)은 조기인데 군의 서쪽 파시평(波市坪)에서 난다. 봄·여름 사이에 어선들이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청에서 세금을 받아 국용(國用)에 이바지한다’고 기록돼 있다.

‘신동국여지승람’ 영광군편에는 ‘파시전(波市田)이 군 북쪽 20리에 있는데 조기가 생산된다. 매년 봄에 경외(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파는데 서울 저자거리와 같이 떠도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 고깃배들은 모두 세금을 낸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파시로 어세, 장세를 징수했고 영광지역 어업과 상업이 크게 번성하는 기반이 됐다.

그러나 파시와 함께 천년을 이어온 황금어장은 영생을 누릴 것만 같았으나 영화는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 칠산 조기파시는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해방 후에도 한동안 계속 되다 60년대 말, 칠산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지면서 끝나고 말았다.

배들이 커지자 얕은 바다와 작은 섬 항구에 파시가 사라졌고 남획으로 고기가 사라지면서 지금은 자취를 감추면서 먼 바다나 다른 곳에서 잡아와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렸다.

게다가 칠산바다에 살던 조기가 사라지고 먼 추자도 일대바다에 조기어장이 형성됐다. 그래서 지금의 법성포 굴비는 사실 추자도나 먼 서해바다 조기로 만들어지고 있다.

흥청 거렸던 옛 자리는 섬을 오가는 연락선과 낚시배로 채워졌고 다른 곳에서 잡아온 조기를 말려 가공한 굴비를 파는 굴비거리만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사라진 조기에도 불구하고 영광 법성포는 아직까지 굴비의 본 고장이다. 바람이나 온도면에서 추자도나 제주도보다는 더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70~80년대만 해도 조기 어획량 감소에 따라 굴비 생산량이 다소 줄었지만 2011년부터 영광군이 법성포를 ‘굴비특구’로 지정해 관련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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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의 어업생산통계에 따르면 굴비로 대표되는 수산물 염장 건조제품의 영광 지역생산액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37억원에서 48억원으로 소폭 상승했으나 2011년 법성포 굴비가 본격적으로 알려지면서 이후 1457억원으로 크게 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식습관의 변화와 간편식의 발달로 이제는 선물용으로 귀한 조기를 접하거나 백반집의 저렴한 외국산 조기매운탕이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영광에는 현재 굴비 관련 단체가 영광굴비특품사업단·영광굴비조합·영광굴비정보화마을·영광굴비사업자조합 등 4개가 있다. 영광군에 따르면 한때 500개가 넘던 굴비가게는 그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영광군 역시 전통주력산업인 굴비산업 회복을 위해 ‘굴비산업 발전계획’을 세워 영광굴비의 인기회복과 굴비의 거리 가게 살리기에 나섰으나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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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입맛은 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좋은 맛은 시대가 흘러도 그 맛은 이어지고 전해진다. 영광굴비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현재의 ‘영광’을 놓치지 않았나 돌아봐야 할 시점이다.

영광굴비는 경쟁력이다. 영광굴비가 유명한 것은 다른 지방에서 가공한 조기보다 유별나게 맛이 좋기 때문이다.

맛있는 영광굴비의 비결은 소금과 바람, 일조량이다. 3년 간수가 빠진 영광 천일염은 참조기를 맛있게 간해준다. 여기에 법성포 해안가의 큰 일교차는 영광굴비의 맛을 한층 끌어 올려주고 서해에서 불어오는 습도 높은 하늬바람 역시 맛을 더해준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자린고비’ 처럼 입맛 다시며 쳐다 볼 것이 아니라 영광굴비의 부흥을 위해 조기 두름의 끈을 다시 한번 힘주어 매어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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