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계약형태보다 근무형태가 중요"
근로자성 인정 여부, 법원마다 판단 엇갈려
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프로 축구단 포항스틸러스 전 대표이사 장모씨의 상고심에서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장 전 대표는 지난 2004년 1월부터 2015년 1월까지 포항스틸러스에서 부상 방지 및 재활 보조 업무를 맡은 트레이너 A씨에게 퇴직금 4000만원을 연장 합의 없이 퇴직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심은 A씨가 구단 소속 직원이 아니기 때문에 퇴직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며 장 전 대표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A씨와 구단이 용역도급계약을 체결한 점 △업무 특성상 전문성이 요구돼 구단의 직접적인 지휘·감독이 어려운 점 △일반 직원들에게는 지급되지 않은 승리·우승수당이 지급된 점 △A씨가 국민건강보험 및 국민연금 지역가입자였고, 사업자로서 종합소득세를 내온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항소심은 “계약 형식이 도급 계약이더라도 실제로는 해당 구단에 종속돼 근로했다”며 A씨의 근로자성을 인정, 장 전 대표에게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단 근거로 ‘근로자성 인정 여부는 계약의 형식보다 근로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용역도급계약서는 A씨가 근무하던 중 작성된 것이고, 업무 내용이 달라지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계약서 변경은 형식적인 것으로 보인다”며 “국민건강보험과 종합소득세 등은 사용자인 피고인이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서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대법원도 원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A씨는 포항스틸러스를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도 승소해 4100여만원의 퇴직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처럼 트레이너의 근로자성 인정 여부를 두고 1·2심이 다른 판단을 내놓은 건 처음이 아니다. 프로 농구단 트레이너로 근무하던 B씨도 구단을 상대로 퇴직금 관련 민사 소송을 제기했지만 A씨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맞았다.
2006년 7월부터 KT농구단 트레이너로 근무한 B씨는 선수 재활 관리·회복 지원·홍보·전력분석 등의 업무를 맡았다. 2015년 4월 갑작스레 해고 통보를 당한 B씨는 KT농구단의 모기업인 KT스포츠에게 퇴직금을 요구했으나, A씨와 마찬가지로 ‘도급계약’이라는 이유로 퇴직금 지급을 거부당했다.
1심인 서울서부지법 민사22단독 이종광 판사는 B씨를 근로자로 인정하고 KT스포츠가 4650여만원을 줘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2심은 1심 판결을 뒤집었다.
같은 법원 민사1부(신종열 부장판사)는 “트레이너가 선수단 감독의 지시·감독을 받는 것은 사무국과는 별개”라며 “B씨가 KT스포츠의 근로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선수 건강관리, 기술 및 전력 향상 등은 전문 영역에 속해 KT스포츠가 지시·감독할 수 있을 만한 성질도 아니라고 봤다.
해당 사건은 현재 상고심에서 계류 중이다. 다만 포항스틸러스 사건에 대한 최종 판단이 나온 만큼, 대법원이 B씨의 근로자성도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
익명을 요구한 A노무사는 “근무 중 임의적인 계약서 변경, 개인사업자로 종합소득세를 내게하는 것 등은 사실 트레이너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종에서 일어나고 있다”며 “이처럼 ‘도급계약’을 했더라도 근로자로 인정하는 판례가 많아질수록 여러 업종에서 퇴직금, 임금체불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