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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울릉도 ‘와달리 마을’, 잊혀질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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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호 기자

승인 : 2019. 07. 21.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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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9월 9일 국민성금으로 지어진 해돋이호가 와달리마을에 전달되자 주민들이 반기고 있다. 송아지도 국민성금으로 구입, 전달됐다. 앞에 보이는 섬이 죽도다. /제공=울릉교육지원청
올해 경북 울릉도에 울릉섬일주도로가 개통되면서 한 마을이 사라졌다. 한때 국민들에게 ‘해돋이 마을’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바로 울릉읍 와달리 마을이다. 울릉도 본 섬에 있지만 둘러쌓인 높은 암벽 등 자연환경으로 인해 독특한 문화를 지녔던 섬 속의 섬이다.

와달리 마을은 올해 초 개통된 일주도로 건설에 대부분 편입돼 공사가 시작되면서 살았던 주민 추억마저 함께 묻혔다. 마치 댐 건설 등으로 수몰 된 마을처럼.

그 곳에 살았 던 주민들은 길 경계에 놓인 바위를 보며 분교와 예배당을 오가며 뛰어놀던 어릴적 동심을 회상하고 덕장이 놓인 해변가를 보며 명태 눈알을 빼먹 던 어린 개구쟁이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뒤산 뽈두나무, 염소굴과 용굴로 가는 길 등 곳곳에 주민들의 추억이 묻어있지만 이제 콘크리트가 뒤덮혀 어렴풋한 추억 마저 짜내도 붙일 곳이 없다.
울릉군지에는 개척 초 사람이 살지 않을 시기에 한학자인 한윤영이 홀로 은거하며 ‘혼자 누워 살아도 뜻은 하늘에 달한다’고 해서 한자식 지명으로 ‘와달리’ 혹은 ‘와다리’라 불렀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이규원 관찰사가 1882년 울릉도를 방문했을 당시 ‘와달웅통구미’로 불리고 있어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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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로 추정되는 와달리 마을 모습. 주민들이 밤새 잡아온 오징어를 건조하기 위해 작업 중이다. 한 아이가 오징어를 가지고 놀고 있다./제공=울릉교육지원청
일제 강점기부터 이 곳에 적지 않은 사람이 거주했다. 어렵사리 구한 1928년 만든 지적도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적은 면적에 비해 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한 듯하다. 거주민들은 울릉도에 건설바람이 불며 항만, 도로가 건설되는 1970년대를 거쳐 1980년 중반부터 점차 떠났다고 한다.

1978년 주민들 이주가 가속화 되자 당시 언론은 “주민들의 생업수단인 3톤급 경진호가 파손, 침몰돼 생계가 막막해 타지역으로 떠나 4세대 18명만이 남았다”고 전했다.

취재 중 느낀 것은 생계와 교통 등의 불편감도 이주의 큰 이유였겠지만 지역내 형성된 높은 학구열도 한 몫 작용한 듯하다.

학생들의 놀이공간을 위해 폐가를 마을공동으로 매입해 학생들의 놀이터도 만들고 소풍, 운동회 때면 마을 전체가 축제였다. 소풍도 마을 여행이었다. 소풍 땐 같이 간 주민들은 솥을 걸고 요리를 해 함께 즐겼다. 마을 공동체 같은 삶이었다.

1969년 3월 석포초교 와달리분교가 설립됐고 12년이 넘게 이어오다가 1981년 7월 저동초교로 통합되면서 폐교를 맞았다. 분교 1세대들이 중·고등학교 취학을 위해선 집을 떠나 학교가 있는 옆 동네에 기숙을 해야만 했다.

반농반어의 산업 구조상 부부가 함께 일하는 가정이 많아 아이까지 돌볼 사람이 여력이 없자 분교 1세대들이 동생과 함께 떠나 자연스럽게 공동화가 발생했다. 현 울릉읍 저동리 지역엔 와달리에서 살던 이주민들이 상당수 살고 있다.

분교 등이 들어설 당시 와달리 마을은 아마 최고의 전성기였다. 예배당(개척교회)도 들어섰다. 부정기 도선 형태의 해돋이호가 이 곳을 운항했다. 해돋이호는 초기에 범선, 강꼬배에서 발동기 엔진을 장착한 어선형태로 바뀐다. 국민성금으로 지어진 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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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9월 9일 경북 도동항에서 열린 ‘해돋이호’ 진수식 모습.해돋이호는 한동안 와달리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 역할을 해왔다. /제공=울릉교육지원청
당시 와달리 분교가 중앙언론에 알려지며 전국 국민은 분교나 마을 이름보다 ‘해돋이 학교’, ‘해돋이 마을’로 인식하게 됐다. 왜냐하면 독도를 제외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는 마을이었기 때문이었다.

와달리는 1970년대 말부터 집단이주가 가속화 되다가 2010년 초반까지 상주하던 울릉경비대 소속 와달리초소 병력마저 철수하면서 비워졌다. 이후 이곳에 살던 주민들은 추석이나 휴가 때 간간이 옛길을 이용해 남아있던 산소나 집터를 찾아 추억을 회상하고 했었다.

와달리 마을은 지역에서 보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해돋이호가 운항이 중단되자 분교 학생들이 펼친 운항재개 모금운동에 국민 및 해외에서도 기꺼이 동참했었다. 성금으로 새로운 배가 건조됐고 학교나 마을 등에 지원 및 생필품 등이 전해지기도 했다.

또 학생들은 국회나 기업, 방송국 등에 잇따라 초청되기도 했다. 대구 중앙초교와 서울의 유명 초교 등과 자매결연도 맺었다.

와달리 마을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알려졌을까? 분교 설립 후 울릉도 내에서도 가징 오지에 부임한 교사들은 자녀들의 은사이자 지식층이었다. 교사 중 주민들과 가까이에서 소통하던 한 교사의 노력이 있었다. 분교 폐교를 막기위해 여대생들과 함께 모금운동을 시작하면서 언론 등에 알려졌다. 왜이리 지명 뜻과 닮았을까? ‘학자의 노력이 하늘에 다달은 듯 하다.’

와달리 마을의 특이점은 울릉도의 부속도서 중 죽도를 관장했다는 점이다. 죽도는 저동항에서 동쪽 4㎞, 도동항에선 7㎞ 떨어진 유인도다. 1970년대까지 20여가구가 거주했었다. 와달리와 죽도는 2㎞, 해변에서 눈에 잡힐 듯 바로 앞에 있는 섬이 바로 죽도다.

죽도 주민들은 상부, 중부, 하부에 설치한 봉수를 이용해 식수부족, 급한환자 등이 발생하면 불을 피웠다. 봉수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와달리 주민들은 지체없이 노를 저어 죽도에 구원의 손길을 펼쳤다. 또 와달리 마을주민 일부가 죽도로 이주해 살기도 했다.

울릉도에서도 오지인 와달리에 정착한 주민들은 오히려 자기보다 힘든 타지역 섬주민들을 돕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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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8일 경북 울릉도 와달리 마을 입구 전경. 이전 범선 등으로 조업하다 1969년 9월 마을에 처음으로 발동기어선이 들어왔다. 어선 옆 큰 집은 1971년 7월 지붕을 개량했다. /제공=울릉교육지원청
와달리 마을은 지역주민들의 편의성과 맞 바꿨다. 수몰마을의 흔적처럼 교통혁명에 묻혔다. ‘개척민의 애환과 울릉도 내에서도 독립된 섬 속의 섬 같은 특이한 마을’, ‘국민들에게 해돋이 마을로 알려진 마을’ , ‘울릉도에서 독도를 조망 할 수 있는 마을’, ‘죽도를 관장한 마을’ 등 참 많은 수식어가 열거된다.

공간에 대한 담긴 인문학적 접근 필요성이 크다. 주민의 흔적은 사라졌고 기억 또한 사라지고 있다. 의미를 부여할수록 가치는 커진다. 와달리 마을도 울릉군이 추구하는 스토리텔링 관광자원 중 하나 아닐까?

올해 초 만난 한 출향인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가슴속에 남아있다. “내가 살았던 고향산천, 이제 두번 다시 볼 수 없는 마음의 고향이 됐다. 그곳에 사라진 흔적을 회상하고 되돌아 볼 수 있는 작은 공간, 빛바란 사진 한장만이라도 남겨주면 좋겠어요.”
조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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