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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숙청을 수행하고 있던 비밀경찰국장 야고다는 레닌의 훈장(the Order of Lenin)을 수여받고 국방상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놀랍고도 황당하게 스탈린은 갑자기 그를 인민의 적으로 체포했다. 그는 반-스탈린 음모에 가담했다는 등의 죄목으로 체포되었지만 사실은 그가 15년 동안 스탈린의 더러운 명령을 수행한 뒤라서 많은 시체들이 묻힌 곳을 알고 있다는 죄를 범한 것이라고 옛 볼셰비크들은 속삭였다. 스탈린은 젊은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를 그의 후임자로 임명했는데 그는 전임자보다 더 피에 굶주린 처형자였다. 그는 대규모 체포, 비밀재판, 그리고 즉결처형 등을 선호했다. 1937년 1월 스탈린은 또 하나의 재판 쇼를 명령했다. 17명의 전 트로츠키 지지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것이다. 6월에는 한 사람의 원수(marshal)를 포함하여 8명의 최고위직 장군들이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48시간 후에 모두 처형되었다. 체포된 장군들이 반역죄의 인정을 완강히 거부하자 예조프는 러시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확신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미망인들을 시켜 언론에 그들을 반역자로 비난하도록 명령했다. 거부한 미망인들은 그들의 부모 및 자녀들과 함께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1938년 마지막 대 모스크바 숙청 재판이 열렸다. 이때 21명의 고위급 볼셰비크들이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야고다를 포함했다.
이제 스탈린이 바로 소련이었다. 공포가 러시아를 장악했다. 정부 관리들도 공포에 휩싸였다. 그들은 누군가 자기들을 비난할 것이고 한밤중에 문을 두드릴 것을 두려워했다. 희생자들은 비밀경찰에 끌려가 수개월 동안 다시는 그들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간첩활동에 대해 사형선고를 피한다면 그들은 25년간의 감옥생활에 직면했다. 공포가 마침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예조프 자신의 체포와 처형으로 끝났다. 예조프도 자기 선임자와 같은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그의 후임자로 같은 조지아 출신이며 자기의 열정적 추종자인 라브렌티 베리아(Lavrenti Beria)를 임명했다. 스탈린이 마침내 1939년 3월 새 당대회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대량 숙청의 방법에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모든 러시아인들은 불안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숙청할 대상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대숙청 재판 뒤에 스탈린은 비열하게도 모든 공식문서들을 파기하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인들에게 소련의 역사에 관하여 최초의 정확하고 믿을만한 그림을 제공하기 위해서 스탈린은 자신이 직접 '소련공산당의 짧은 역사(Short History of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를 받아쓰게 했다. 그 속에서 스탈린은 자신의 역할을 영광스럽게 하고, 모스크바 재판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로 쓰고, 그리고 스탈린판 마르크스주의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 책은 당원들에게 바이블이 되었고 모든 소련 학생들에게는 필독서가 되었다. 작가들과 역사가들은 그것을 감히 문제 삼지 않았다. 그 사이 1936년 트로츠키는 노르웨이에서 살고 있었다. 스탈린은 만일 오슬로 정부가 그를 재판을 위해 넘겨주지 않으면 무역관계를 단절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노르웨이는 거절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에게 망명처를 기꺼이 제공할 멕시코로 추방되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는 죽어야 한다고 코민테른에게 담담히 말했다. 1940년 8월 20일 스탈린의 생애에 대해 집필 중이던 트로츠키는 메르카데르(Mercader)라는 광적인 벨기에의 공산주의자가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아 멕시코시티의 비밀 은신처를 발견하고 도끼로 그를 죽였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제국의 수상이 되었을 때 그는 히틀러에게 그들이 발트해 국가들의 국경선과 독립을 공동으로 보장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히틀러가 그런 아이디어에 너무도 냉담하자 스탈린은 국제연맹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번복하기로 분별력 있게 결정했다. 1934년 9월에 가입하여 그는 영국, 프랑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와 방어적 동맹을 구애하기 시작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이 히틀러를 봉쇄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음을 발견했다. 1936년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위반하며 독일의 재무장이 허용되고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하며 라인란트 점령이 허용되었을 때 스탈린은 점점 불안하게 되었다. 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스페인에서 프랑코(Franco)장군의 파시스트 봉기를 자유롭게 지원했을 때 황당했다. 그리고 독일과 일본이 반-코민테른 조약을 체결했을 때 더 크게 당황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러시아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자유의 챔피언으로서 러시아 측에 대한 세계여론을 조성하기 위해서 스탈린은 코민테른에게 스페인의 왕정군을 위한 국제원정 자원여단을 충원하여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보낸 군대와 싸우기 위해 그들에게 무기를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은 물론 서방세계에도 이익이기 때문에 반-파시스트 통일전선과 집단안보를 위해 과시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들이 스페인 왕당파들에게 물들어 소련으로 반-스탈린 봉기의 필요성을 소련으로 가져올 것이 두려워 스페인에 보내는 러시아인들의 수를 제한했다. 마드리드가 마침내 프랑코의 손에 떨어졌을 때 그리고 히틀러가 스페인에서 병력을 철수했을 때 스탈린은 모스크바에 있는 미국 대사 데이비스(Davies)에게 히틀러에 대항하여 집단안보조약을 밀고 나가라고 촉구했다.
유럽의 사건들은 빠르게 절정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병합했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했으며 독일의 역사적 팽창정책인 동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은 1938년 9월 뮌헨에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프랑스의 델라디에와 함께 히틀러를 만나서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분할하기로 동의했다. 뮌헨회담에 참가하지 못한 데 화가 난 스탈린은 이제 영국과 프랑스가 의도적으로 나치의 소련 침공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고 분명하게 확신했다. 그는 또한 만주의 국경선에서 붉은 군대에 대항하여 일본군과의 충돌을 부추기고 있다고 서방을 책망했다. 그것은 소련에 대항하여 2개의 전선을 여는 것이 아니겠는가?
히틀러는 폴란드의 공격을 준비하면서 스탈린에게 만일 그가 불가침 조약뿐만 아니라 스탈린이 요구했던 발트해 국가들의 공동보장도 제안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는 스탈린에게 리벤트롭(Ribbentrop) 독일 외상을 모스크바에 초대하여 조약을 협상하도록 촉구했다. 그리고 스탈린은 그렇게 했다. 리벤트롭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 사이의 강렬한 증오심을 완화시키려고 했다. 그와 레벤트롭은 외교적 거짓말을 교환했다. 리벤트롭은 반-코민테른 조약이 실제로는 소련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서방의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대항하는 것이라고 스탈린을 안심시켰다. 반면에 스탈린은 그 조약이 영국의 재정가들과 상점주인들만을 놀라게 했다면서 히틀러의 건강을 위해 축배를 담담하게 제안했다.
나치-소비에트 불가침 조약(the Nazi-Soviet nonaggression Pact)은 1939년 8월 24일에 체결되었으며 스탈린이 동부 폴란드에서 행동의 자유를 갖는 반면에 서부 폴란드가 독일에 떨어질 것이라는 비밀 합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리벤트롭과 헤어지면서 소련은 이 조약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조약에 관한 소식은 서방 국가들의 수도에는 폭탄처럼 떨어졌다. 런던과 파리는 분개하여 스탈린을 비난했지만 그들은 동맹을 위한 스탈린의 제안에 등을 돌렸었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히틀러를 달래는 데 있어서 스탈린은 그들이 뮌헨에서 자기들이 했던 짓을 그대로 했던 것이다. 체임벌린과 델라디에가 먼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나치의 굴레 속으로 팔아 넘겼던 것처럼 이제 스탈린이 폴란드의 독립을 비운으로 봉해버렸다.
1939년 9월 1일, 독소불가침조약의 체결 일주일 후에 히틀러는 전쟁선포도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자기가 테이블을 뒤집고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서로 전쟁에 들어가게 했다고 기뻐 날뛰었다. 그러나 그는 소련의 국가적 위신에 엄청난 손상을 끼쳤다. 스탈린은 서방 언론에서 엄청난 비웃음을 샀다. 1941년 7월 3일 히틀러에 배신당한 뒤에 스탈린은 방송을 통해 러시아는 1년 반 동안 러시아에 평화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방어를 준비할 기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말은 행동과 무관하고 좋은 말은 나쁜 행동을 숨기기 위한 마스크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에게 '진지한 외교란 마른 물이나 나무 철보다 더 가능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가 독일과 홀로서 싸워야 하는 재앙적 위치로 몰고 가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제 공산주의가 아니라 러시아의 국가이익이 더 중요했다. 스탈린은 피터 대제(Peter the Great)만큼이나 러시아의 민족주의자로 돌변했다.
스탈린은 히틀러의 기지에 맞섰다 그는 핀란드의 기지들을 레닌그라드의 방어에 긴요하다고 요구했지만 그러나 반소 독일 지향적인 핀란드인들이 거절했다. 그러므로 스탈린은 소련의 항공기들이 핀란드 도시들을 폭격하는 동안에 붉은 군대를 핀란드로 진격시켰다. 히틀러가 약이 올랐다면 서방은 분노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고려했지만 그 대신에 러시아를 국제연맹에서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소련의 위신에 대한 최악의 타격은 굉장히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으로 싸운 핀란드 병력들에 의해서 행해진 치열한 저항이었다. 그러나 결국 핀란드의 수상이 굴욕적 평화를 위해 모스크바로 갈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전격적 정복을 이어갈 때 스탈린은 걱정스럽게 관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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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