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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욱 칼럼]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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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3. 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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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대기자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말기 기자를 시작했다.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기자의 역할이 지대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사했다. 그런데 기쁨은 잠시였다. 수습기자들은 예외 없이 곧장 사건기자에 투입됐다. 사건기자의 하루는 정말 길었다. 새벽녘 담당 지역 내 경찰서·병원 등지를 쏘다녔다. 낮에는 대학가 등지를 돌아다녔다. 회사에 돌아와서는 밤늦게까지 기사 발굴 기획회의를 했다. 그리고 회식 자리에 갔다. 취재원과도 만나야 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날이 제법 됐다. 집 가기가 마땅치 않으면 경찰서 직원 숙소에서 몇 시간 겨우 쪽잠을 잤다. 그런 일상을 되풀이했다. "뭐 이런 직업이 다 있어?" 몸과 마음이 지쳐갔지만 남모를 사명감과 보람으로 견딜 수 있었다. 지금도 품고 있는 선배 기자의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의사는 수술 잘못하면 환자 1명의 목숨만을 앗아가겠지만, 기자는 오보를 쓰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의 목숨과 마음을 빼앗는다."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멕시코국립박물관을 찾아 마야 문명의 웅장함을 봤다. 광장에 앉아 있던 시민에게 말을 걸었다. 직업을 물었더니 의사라고 했다. 의사면 돈을 많이 벌겠다고 말했다. 그 의사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의사는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다. 의사는 의술을 펼치는 일을 한다. 가난한 환자를 도와야 한다."

서울대의대·병원 소속 하은진 중환자의학과, 오주환 국제보건정책, 한세원 혈액종양내과, 강희경 소아청소년과 교수 등 4명은 의료 파업 속, 사직 전공의와 휴학 의대생을 향해 용기 있는 목소리를 냈다. 그냥 정년까지 조용히 지내면 적지 않은 급료와 사회적 존중을 받을 분들이다. 그런 분들이 비난을 감수하면서 입장을 냈다. 그들이 낸 성명을 읽고 또 읽었다. 공감 가는 내용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들은 의사가 전문가 맞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성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그 대가로 존중을 받는 존재'라고 정의돼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의사 면허가 곧 전문가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기자가 당대의 사회상을 기록하는 전문가라고 한다면, 불편부당한 시각으로 사회를 들여다보고 글로 남겨야만 사회적 책무에 충실했다는 평을 들을 수 있다. 여러 가지 사유로 의료 현장을 떠난 의료인들은 지금 사회적 책무, 의술을 펼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이들의 성명에 더해 묻는다.

의사 면허에 대해서도 질문하고 있다. "의사 면허는 사회가 우리에게 독점적 의료 행위를 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소성을 인정받고,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사회가 의료 분야에서 독점적 구조를 용인하면서도 그 부작용을 감수하는 이유는 면허 이면에 공공성을 요구하는 책임을 다해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사의 공공성과 책임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착취인가, 전문가로 성장하는 과정인가' 항목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련의 때 착취를 당하면 당할수록 의술이 뛰어나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믿음직한 의사가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면 지나칠까. 교수들은 전공의들이 국회 토론회에서 노동 시간과 월급 등 처우에 대해서 주로 얘기했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생산직·서비스직 노동자들은 12시간 넘게 서서 일하면서도 언제 직장에서 잘릴지 모르는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자영업자의 75%는 월 100만원을 벌지 못한다. 그중 소득이 0인 사람이 100만이다. 그들의 삶이 여러분의 눈에 보이기는 하나"라고 되물었다.

그들은 '상대가 밉다고 우리의 터전을 파괴할 것인가' 항목에서 "정부가 잘못한 것이 맞다. 그렇다고 의료계도 똑같이 굴어야 하나. 남수단·시리아 내전 같은 상대에 대한 증오로 인한 극단적 대립은 그 나라를 파괴했다. 결국 모두가 무너진 것이다. 그런 승리는 무슨 의미가 있나"고 물었다. 판을 깨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질문했다. "정부와는 다르게, 책무를 다하는 전문가의 모습으로 개혁을 이끌 것인가. 사회와 의료 환경을 개선하면서도, 우리의 근로환경 역시 지속 가능하게 바꿔갈 것인가. 그를 위해 기꺼이 양보하고 서로 도와가며 주도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계속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낙인찍혀 독점권을 잃고 도태될 것인가. 이제 여러분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푸념하는 의사들을 가끔 접한다. 몇 평 안 되는 공간에서 온종일 아프다고 얼굴 찡그리고 들어오는 환자들과 만나다 보면 진료실이 감옥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마지막에는 싱긋 웃는다. 그래도 돈은 많이 번다, 그래서 버틸 수 있다고. 그렇다면 의사에게서 돈을 빼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의료현장 주변에 여전히 머물고 있는 의료인들은 용기 낸 4명의 교수들의 고언(苦言)을 귀담아 듣고 즉각 행동에 옮겨야 할 때다. 의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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