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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기자의 스포츠人] 1988·1991 득점왕 이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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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3. 0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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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1991 K리그 득점왕 타이틀을 2회 차지한 이기근(59)./ 사진=전형찬 기자
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선임 기자 = 1988년 K리그 득점왕은 이기근(59)이다. 1991년 득점왕도 이기근이다. 그는 한국 프로축구 최초의 득점왕 2회 등극자다. 이 정도면 전설이라 불릴 충분한 자격이 있다.

- 근황이 궁금하다.

"관동대 감독(2019~2021)을 마지막으로, 제자들 지도하다가 지금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축구는 언제 시작했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시작했다. 왕십리 쪽에 있는 신답초등학교다."

-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나.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축구를 시킨다는 아버지의 확고한 철학 때문에 축구를 시작하게 된 케이스다."

- 아버님은 왜 그렇게 축구에 꽂히셨나.

"아버님 본인 자신이 축구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부모님의 반대로 그만두셨다. 그래서 그 꿈을 자식인 저에게 투영하신 듯 하다."

- 아버님은 언제까지 선수 생활하셨나.

"논산 강경상고에서 선수로 뛰셨다."

- 초등학교 졸업 후 한양 중학교로 진학했다.

"초등학교 때 그 저희 팀 멤버가 좋아서 한양중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 고등학교는 동일계 한양공고로 진학하지 않고, 우신고등학교로 갔다.

"우신고등학교는 지금은 해제됐지만, 최강희, 당성증(2013년 대구FC 감독) 등 2명의 프로 지도자를 배출했다. 최감독님은 선배시고, 당 감독은 제 동기다."

- 왜 축구 명문고가 아니라 우신고를 선택했나.

"명문팀에 가서 1~2학년을 벤치에서 지내는 것보다, 1학년 때부터 경기를 뛸 수 있는 곳으로 간다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동의해 주셨고 그래서 우신고를 택했다."

- 고등학교 때 성적은 어느 정도였나.

"3년 동안 고등학교 전국대회 4강 한 번 간 것이 제일 좋은 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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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고등학교 시절의 이기근. (가운데 붉은색 경기복)/ 사진제공=이기근
- 그때는 특기자 제도가 있었다. 4강에 못 들면 대학을 못 갔다.

"4강 진출한 것이 제 고3 때다. 그래서 한양대 진학이 가능했다."

- 한양대 동기로는 누가 있나.

"83학번으로 김종민, 유병옥, 이태형 등 멕시코 청소년 대표 동기들이 있었다."

- 본인도 1983년 세계 청소년 4강 신화 멤버 중 하나다.

"81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청소년 대표로 처음 뽑혔다."

1983년 세계대회 예선을 겸해 1982년 8월 싱가포르에서 제23회 아시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본선 진출권은 2장이었는데, 대한민국은 탈락했다. 준결승에서 북한에게 3-5로 졌기 때문이다. 1-0, 1-1, 2-1, 2-2, 2-3, 3-3, 3-4, 3-5로 이어진 명승부였다. 이기근은 그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었다. 전반 3분 우측 외곽에서 날린 슛이 포스트를 맞고 들어갔다.

"제가 골을 넣은 것 보다도, 북한한테 지고 나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러워서 고개를 숙였던 기억이 난다."

- 북한은 그때 연령을 좀 속여서 나오지 않았나.

"골격이나 이런 근육으로 봤을 때는 뭐 저희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긴 했다."

- 경기 중 욕도 좀 하고 그랬나.

"생각보다 그렇게 욕하고 거칠게는 안 했다. 남북이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극적으로 세계대회에 나간다. 1982년 말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북한 축구 선수단이 심판을 구타하는 등 유혈사태가 벌어지자 FIFA(국제축구연맹)는 북한의 국제대회 출전을 2년간 금지했다. 아시아 예선을 3위로 마친 대한민국이 대타로 출전권을 승계한 것이다.

- 세계 대회 출전 소식을 들었을 때 심정은.

"일단은 너무나 기뻤다. 한편으로는 세계대회를 가서 우리가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다. 결과적으로, 4강 진출이라는 대단한 성적을 내는 바람에 저희 선수들이 다 유명해졌다. 멕시코 대회는 추억이 많다.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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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세계청소년 4강에 오른 대한민국 선수단./ 사진제공=이기근
- 고지 적응 마스크 훈련은 효과가 있었나.

"코로나 때 마스크 매일 쓰고 생활하지 않았나. 큰 효과는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심리적인 효과는 있었다고 본다."

- 문제는 특급 골잡이 이기근이 본선에서는 거의 출전 못했다는 사실이다. 피지컬이 밀린다는 이유였다. 폴란드와의 3 4위전 한 경기에 나와서 1골을 넣었다. 대각선 슛이었다. 벤치에 있을 때 심정은.

"선수로서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좌절감도 상당했다. 멕시코 청소년 대회 갔다 와서 축구를 그만둔다는 생각까지 했었으니까."

- 예선에서는 주전 스트라이커였다.

"교체도 없이 전 경기를 거의 다 뛰었다."

- 박종환 감독의 그 결정을 지금도 납득하나.

"결정은 감독이 내리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감독이 지는 것이니까...다만 그 당시 제가 느꼈던 심정이 지도자 생활할 때 큰 경험이 됐다."

- 예를 들자면.

"선수들이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끔 지도하는 것을 지도자 생활의 가장 큰 목표로 삼았다."

- 프로팀 입단할 때는 어디 어디로부터 제안받았나.

"현대, 유공 등에서도 제의가 있었지만, 그 당시 한양대 출신은 다 포항제철로 가야 한다는 묵계가 있었다. 거의 기정사실이어서, 다른 팀들이 적극적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 1987년 입단, 1988년 1991년 두 번 득점왕을 차지했다. 1988년 시즌엔 갑자기 득점이 늘어났다.

"그때는 슛하면 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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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근은 1988년 K리그 득점왕을 차지했다./ 사진=이재형 축구수집가
- 갑자기 결정력이 좋아진 배경이 있나.

"결정력이 좋아진 건 결국 반복 훈련의 결과다. 많은 슈팅 연습, 그다음에 그 슈팅이 가는 방향에 대해 느끼는 감각 뭐 이런 것을 반복 훈련했다. 항상 실전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시즌 종료 후 MVP도 유력했는데, 대표팀 차출로 6개월만 활약한 박경훈이 MVP가 되면서 박경훈이 MVP가 수상을 거부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마땅히 이기근이 받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박경훈 선배님이 현장에서 수상을 거부했다. 사실은 저도 당연히 제가 MVP를 받는다고 생각했었다. 굉장히 난처한 상황이 발생했다. 그래서 나중에 MVP 트로피가 박경훈 선배 집으로 배달되었다. 프로축구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벌어진 일이다."

- 그때 심정은.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지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섭섭해서 한양대 대선배이신 이회택 감독님한테 좀 제 의사를 표현했다. 제가 지도자가 되고 나서 보니까, 선수로서 어필을 자제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 1988년에는 득점왕 및 팀 우승, 1991년 득점왕, 1992년 우승 등 업적이 많다.

"포항제철은 1987년 최상국, 1988년 저, 1989년 조긍연 등 3년 연속 득점왕을 배출했다. 진기록이다. 1991년 시즌엔 저희가 우승, 준우승권은 못 갔지만 제가 16골을 넣어 득점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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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득점왕 수상 확정 후 언론과 인터뷰하는 이기근 선수./ 사진제공=이기근
- 득점왕을 차지하는 데 가장 도움을 준 선수라면.

"그 당시엔 모든 선수가 다 저한테 좋은 패스를 주려고 노력 많이 했다. 그래도 한 사람만 꼽으라면 미드필더로 활약하던 이흥실 선배님이다. 그해 도움왕에 오르셨다."

- 국가대표로는 거의 인연이 없다. 1991년 2경기 출전이 전부다. 섭섭하거나 후회라든가 그런 느낌은 없나.

"지금은 여러 선수가 대표팀에서 기회를 받는다. 저희 때는 누군가 대표팀에 뽑혀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면 거의 교체 없이 갔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대표팀 경기력 향상을 위해 대표 선수는 프로 경기 후 바로 대표팀 합숙소로 복귀하던 시절이다. 붙박이 주전 사이의 팀워크를 끈끈하게 만들려면, 다양한 선수에게 기회를 주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 한국 축구가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테크니션들에게는 좀 박덕했다. 예를 들면 윤정환, 왕선재, 이기근, 최문식 등이다. 이태호 선수는 좀 예외라고 할 수 있지만. 한국 축구가 테크니션들에 대해 박하게 평가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없나.

"지금은 테크니션들을 많이 발굴하고 다양한 능력을 갖춘 선수가 나오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테크닉보다는 투지와 체력을 강조하던 시대다. 그런데 이것도 돌이켜보면 당시 환경과 관련이 있다."

- 뭔가.

"경기장 피치가 고르지 않았으니까 섬세한 플레이보다는 체력으로 승부하는 플레이가 돋보였던 거다. 섬세한 플레이가 왜 필요하고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없었던 시절이다."

- 시대적 제약인가.

"그때 당시에도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들이 더 많이 나오고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 당시 환경 그리고 지도자가 추구하는 방향하고는 좀 안 맞았던 것 같다. 그래서 테크니션들이 좀 피해를 봤다고도 생각한다."

- 포항에서 6년을 뛰고 1993년 대우로 이적했다.

"자유 계약으로 풀렸다. 1992년 말에 완산 푸마가 창단 선언하고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황선홍을 뽑았다. 1 대 7 트레이드로 포항이 황선홍을 받고, 저와 이흥실, 조긍연 등이 완산으로 가는 상황이었는데 창단 불발로 자유 계약 신분이 된 거다."

- 그건 말도 안 되는 헤프닝이었다. 왜냐하면 완산 푸마는 창단 준비 중이었지 창단을 마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완산 푸마는 제우 엑세터, 완산 푸마, 전북 버팔로로 팀 운영 주체가 바뀌다가 우여곡절 끝에 1994년 리그에 참가하고 1년 만에 해체했다.

"그 당시에 7명 중 6명은 사인했고 저는 사인을 안 하고 버텼다. 제가 사인을 안 하면 황선홍 선수는 포항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저랑 포철이 서로 양보해서 대우에 입단했다."

- 은퇴는 수원 삼성에서 했다. 김호 감독이 콕 집어서 이기근을 스카우트 했다.

"그 당시에 김호 감독님이 저를 좋아해 주셨다. 조광래 코치님도 '다시 한번 도전해 보라'고 기회를 주셨다. 그 기회를 감사하게 받았다. 약간 노장이었지만, 수원 삼성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 본인의 프로 생활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울퉁불퉁한 가시밭길이었다. 득점왕도 두 번 했지만 2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1군으로 올라오고, 평탄하게 한 1년 가다가 또 득점왕 하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가고 그랬으니까."

- 2군으로 내려간 이유는.

"글쎄. 당시 지도자 선생님들의 선택이었다. 2군에 가서 훈련하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지만 내려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지금 같으면 대화로 푼다든가 상담도 가능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오더가 내려오면 따라야 하는 시대였다."

- 은퇴 후 2009년, 연고가 없는 강원도 횡성에서 폐교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축구 가르치는 학부형들이 모여서 선수 훈련을 시키고 있었는데 저한테 감독으로 합류해 달라고 제의가 왔다. 연습 구장 등 횡성의 축구 환경, 시스템이 마음에 들었다. 브라질 출신 코치들도 있었다. 그래서 갑천중고교와 협약을 맺은 횡성FC 창단 감독으로 갔다."

- 2019년엔 관동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2021년까지 있었다. 강원도와 인연이 깊다."

- 가장 기억나는 제자라면 누가 있나.

"현재 청주 FC에서 뛰고 있는 윤민호라는 선수가 있다. 서울에 있는 좋은 고등학교에 갔다가 적응에 실패해서 갑천고까지 왔다. 횡성에서 저하고 다시 손 잡고 능력을 끌어올렸다. 프로까지 가서 잘하는 걸 보면 지금도 마음이 흐믓하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이라면.

"이회택 선생님이다."

- 이기근 축구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무래도 멕시코 청소년 예선전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 아까 멕시코 본선 마치고는 축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고 했다. 다시 축구를 하게 된 계기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작은아버지가 굉장히 무서웠다. 저희 아버지만큼 무서웠는데 그 작은 아버지가 제가 축구를 안 한다는 것 때문에 펑펑 우시더라. 감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 다시 축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축구를 하고, 내 인생을 다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 마무리 질문이다. 어떻게 하면 골을 잘 넣을 수 있나.

"슈팅 연습 등 남들 다 하는 것 이외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많이 하라고 권하고 싶다. 실전에서 찬스가 나서 득점한 경우, 득점을 못 한 경우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하는 거다. 한 번 더 치고 들어가고, 슈팅 방향을 바꿔보고 수없이 돌려보는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그다음에 반복 훈련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훈련이 아닐까 한다."

▲ 이기근(59)는 신답초, 한양중, 우신고, 한양대를 졸업하고 포항제철(1987~1992), 대우 로얄즈(1993~1994), 수원 삼성 블루윙즈(1996~1997)에서 뛰었다. 1988년, 1992년 팀 우승에 기여했고 1989년과 1991년엔 득점왕에 올랐다. 1983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4강 신화의 주역이며, 국가대표로는 2경기에 출전했다. 2008년 횡성FC(갑천중고) 총감독으로 부임했고, 2019년부터 2021년까지 관동대 감독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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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2회 득점왕 이기근(오른쪽)과 장원재 선임기자/사진=전형찬 기자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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