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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재의 스포츠人] 중동 볼링의 한국인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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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스카트(오만) 장원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2. 12. 10:01

이훈표 오만 볼링 국가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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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국가대표 볼링팀 이훈표(58) 감독(왼쪽)과 장원재 선임기자./ 사진=전형찬 기자
아시아투데이 장원재 선임 기자 = 선진국은 어떤 나라인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모두 수출하는 나라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수많은 종목의 한국인 스포츠 지도자가 지구 곳곳을 누비고 있다. 그렇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선진국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증명서다. 오만 국가대표 볼링팀 감독 이훈표(58) 감독을 만난 이유다.

- 볼링은 언제 시작했나.

"1984년 12월, 고등학교 졸업식 끝나고다. 본격적으로 친 건 1986년도부터다. 매일 볼링장에 갔다."

- 그때는 한국 볼링의 초창기다. 정식 스포츠 종목 진입을 도모하던 시기다.

"맞다. 볼링 선수가 체육특기자로 대학 진학한 첫해가 1988년이다."

- 대학 졸업하고 군대도 갔다 와서 직장을 다녔다. 1년 후 사직하고 볼링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 대학 때 동아리팀 선수임에도, 그러니까 특기생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국 대회에서도 메달을 땄다. 장래를 고민하다 졸업 후 전공을 살려서 전기 설계 사무소에 취직했는데 죽을 때 후회하지 않으려고 사표를 냈다."

- 집에서 반대는 없었나.

"무지하게 컸다. 아버님이 공무원이셨고, 제가 결혼을 일찍 했다. 제 처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밀어줘서 용기를 냈다. 나중에 지도자나 교수를 하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지금도 아내에게 감사하는 부분이다."

- 프로 볼링이 없을 때지만, 동아리 선수가 실업팀 입단을 한다는 건 상당한 파격이다.

"지금 같았으면 상상도 못하는 일이다. 운이 좋았다. 마침 전국체전에 참가하는 팀에 선수가 부족해서 단체전 출전이 불가능했다. 그 팀에서 급하게 선수 한 명이 필요하다고 해서 연결이 됐다."

- 어떤 팀이었나.

"벽산그룹 소속 실업팀이었다. 제일 좋은 실업팀이었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없어졌다."

- 전국 체전 성적은.

"단체전 동메달이 제 최고 성적이다. 사실은 선수 시절 성적은 일류가 아니었다. 선수로서 콤플렉스도 있다."

- 뭔가.

"국가대표 선수를 못 한 것이다. 선발전은 계속 나갔지만 몇 등 차이로 항상 떨어졌다. 실력이 모자랐다. 체력도 실력이고 정신력도 실력이고 운도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 선수로서는 못했지만 감독으로는 태극마크를 달았다.

"대한볼링협회 국가대표 지도자, 청소년 대표 지도자를 한 번씩 했다. 2002년 여자 청소년 국가대표 코치로 세계 청소년 대회에 나가서 종합 우승을 했다."

- 지도자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1996년 여름에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만 2년을 채 못 채웠다. 감독 선생님이 '선수는 그만하고 지도자를 하라'고 하셨다. 전국체전이 임박해서 다른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바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 볼링계에서는 학구파로 유명하다. 한체대에서 박사학위도 받았다.

"저는 지도자 생활을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시작했는데 부족함을 절감했다. 선수한테 이론적인 것을 다 알려주고 왜 이런 동작이 효율적인지를 설명해줘야 하는데 제 경험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그래서 운동역학으로 석사, 박사를 땄다. 그때의 공부가 물론 고되고 힘들긴 했지만, 지금까지 선수를 지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 세부 전공은.

"운동 역학 중 동작 분석 전공으로, 특히 영상 분석을 전공했다. 영상 분석 기법을 지금도 선수들 지도에 잘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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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표 감독은 운동역학 박사로, 동작을 섬세하게 분석하며 선수들을 지도한다./ 사진=전형찬 기자
- 지도자 생활은 어디 어디서 했나.

"서초고등학교, 개포고등학교, 양재고등학교, 충북도청 등에서 감독을 지냈다."

- 중동은 어떻게 오게 되었나.

"중동에 오기 전 대한볼링협회 사무국장으로 2년 정도 일했다. 사무국장 사직후 세계 볼링연맹을 통해 운 좋게 연결이 됐다."

- 중동 첫 부임지는 어디였나.

" 2013년 여름에 바레인 감독으로 와서 거의 4년 정도 일했다."

- 중동에서 볼링은 어느 정도 인기가 있나.

"워낙 더운 지방 아닌가. 볼링은 실내 스포츠고 또 에어컨을 켜놓은 상태에서 운동을 하기 때문에 꾸준히 인기가 있다. 엘리트, 생활 스포츠 다 포함해서 그렇다."

- 남녀 선수들이 다 있나.

"다 있다. 중동에도 여자 선수들이 있다. 히잡을 쓰고 운동한다."

- 중동의 볼링 강국은.

"지금 현재로는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쿠웨이트가 선두권이다."

- 바레인에서 거둔 성적은.

"아시아권이나 세계권에서 메달은 획득하지 못했지만, 아랍 선수권 대회나 중동 6개국 대항전에선 금, 은, 동 등 메달을 많이 땄다. 남자팀, 여자팀, 유스 모두 성적을 냈다."

- 중동에서 코치 생활할 때 가장 애로사항이 있다면.

"최근엔 어디서나 마찬가지지만, 여자 선수들을 지도할 때 신체적인 접촉 부분에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 스포츠는 특성상 말로만 지도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저 같은 경우는 훈련 시간에 어프로치에 올라가서 선수들 손, 어깨, 다리, 허리를 잡아주고 자세를 지도를 하는 스타일이다. 그것이 더 직관적이고 제일 정확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 불필요한 시비를 피하기 위한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진지하면 문제가 없다. 특히 여자 선수 신체를 접촉할 때 진지한 동작과 진중한 언행을 보여주면 선수들도 다 이해한다. 그래도 조심한다."

- 어떻게 조심하나.

"예를 들어 여자 선수 손목을 잡을 때는 엄지 검지 두 개만 이용해서 살짝 터치한다. 어깨를 짚을 때는 검지 손가락 하나만 가지고 어깨 끝만 살짝 누른다. 머리에다 손을 댈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조심, 조심하면서 지도하고 있다. 당연한 거다."

- 오만으로는 어떻게 부임했나.

"2016년에 바레인 경제가 어려워졌다. 국가가 어렵다 보니 체육부 예산이 많이 깎이고 바레인 볼링 협회도 예산이 줄어서 제 월급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됐다. 계약 연장 불가능하다고 통보받아 귀국 준비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아랍 챔피언십 대회가 이집트에서 열렸다. 그 대회 본부석에 바레인 협회장과 오만 협회장이 우연히 옆자리에 앉았다가 두 분이 이야기 나누고 바로 발령을 냈다."

- 정말 행운이 따랐다.

"마침 오만 대표팀 감독 자리가 비어서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정말 바레인을 떠나느냐고 깜짝 놀라더니 몇 차례나 거듭 확인하더라. 오랫동안 중동 생활해서 적응이고 뭐고 필요 없을 테니 당장 오라고 해서 감사한 마음으로 이사를 했다."

- 오만에선 지금 몇 년째인가.

"만 9년이 넘었다."

- 오만에서 거둔 최대의 성취가 있다면.

"오만은 걸프협력기구(GCC) 6개 나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 UAE, 오만 중에 제일 볼링을 못하는 나라였다. GCC 챔피언십에선 금메달이 없고, 아랍 챔피언십에서는 아예 메달이 없는 상태였다. 제가 오고 나서 GCC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고 아랍 챔피언십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 오만 정부에서도 많이 좋아하나.

"그렇다. 체육부 행사에서 저희 볼링 협회장님이 제일 앞자리 VIP석에 앉는다."

- 볼링 코칭만이 아니라 대회 조직 및 운영, 레인 정비, 지공 등 모든 분야에 정통한 지도자로 유명하다.

"저는 선수 시절부터 괴짜 소리를 들었다. 실업팀 선수 생활할 때도 저희 팀 선수들 지공, 그러니까 손 모양 보고 공에 구멍 뚫는 것을 제가 직접 해줬다."

- 지공의 핵심은 뭔가.

"피팅이다. 선수의 손에 맞고 편하게 크기와 길이와 앵글을 정해서 지공을 뚫는 것이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모든 선수의 손이 다르고 투구 방법이 다르다. 신체의 유연성도 각자 다 다르다. 거기에 맞춰서 공을 뚫어주는 것이 경기력에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 세부적으로는 무엇을 보나.

"손가락 굵기와 길이, 관절의 유연성, 관절이 꺾인 방향을 본다. 아, 피부의 습한 정도 등 여러 가지 별도의 고려 사항이 굉장히 많다. 그래서 지공을 뚫기 전 각 손가락 관절의 유연성을 전부 다 체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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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링공에 구멍을 뚫는 지공은 선수 개개인의 신체적 특성을 총망라한 종합예술이다./ 사진=전형찬 기자
- 오만 볼링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이 감독이 장비를 싣고 1000km를 운전해 대회를 무사히 마쳤다고 한다. 무슨 얘기인가.

"수도 무스카트에서 1000km 떨어진 살랄라라는 제2의 항구 도시가 있다. 거기서 국제 볼링 대회를 했는데 대회장으로 결정된 볼링장에 레인 정비기계가 없어서 그걸 제 차에다가 싣고 운전해서 간 적이 있다."

- 최근에 치른 이벤트가 있다고 들었다.

"2025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무스카트 국제오픈 볼링대회를 개최했다. 제자인 김현민 프로가 자기 제자를 데리고 참가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출전자가 다 중동 선수였는데 인도 선수 하나, 한국 선수 둘의 참가로 국제대회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김현민 선수는 남의 공을 빌려 치고도 8위를 했다. 3~4위권을 오가다 마지막 경기에서 점수를 잃었다. 많이 아쉽다. 그래도 상금 300만원 정도를 받아서 여행 경비는 자체 충당했다."

-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오만의 제자 2003년생 무삽 알아다위(21) 선수가 우승한 것이다. 2017년 저와 함께 볼링에 입문했고, 1년 만에 국가대표 선발전을 최연소로 통과한 볼링 천재다. 상금으로 2만1000달러를 받았는데 그 거금을 바로 어머니 통장에 넣어드린 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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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무스카트 국제오픈 우승자 무삽 알아다위(21) 선수(가운데)와 이훈표 감독(오른쪽), 장원재 선임기자(왼쪽)./ 사진=전형찬 기자
-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제 특기는 지도, 대회 운영, 협회 조직 및 운영을 다 해봤다는 점이다. 볼링협회도 없고 국가대표팀도 제대로 운영을 못하고, 볼링을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나라들이 꽤 있다. 그런 나라를 도와주고 싶다는 꿈이 있다."

- 그 꿈은 아내 분께 허락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반쯤은 허락을 받아 놓은 상태다."
장원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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