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손수연의 오페라산책]라 스칼라오페라하우스 ‘팔스타프’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50131010014307

글자크기

닫기

전혜원 기자

승인 : 2025. 01. 31. 10:56

"담백한 평안함 안겨준 고전적 무대...한 폭의 전원 풍경화 같아"
ㅇ
라 스칼라오페라극장의 오페라 '팔스타프' 중 한 장면. /라 스칼라오페라극장
무척 오랜만에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오페라극장에 다녀왔다. 코로나19가 퍼지기 시작하던 2020년 1월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관람이 마지막이었으니 약 7년 만의 방문이 된 셈이다. 다시 찾은 라 스칼라극장에는 작은 변화들이 눈에 띄었다. 극장 내 좌석 등받이에 자막 스크린이 설치됐고(영어·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 등 유럽 언어 외에 중국어가 포함돼 있다. 빈 국립오페라극장에는 일본어 자막이 제공된다), 전반적으로 디지털 방식으로 접근이 쉬워졌다.

26편의 베르디 오페라 중 '팔스타프'(Falstaff)는 다른 오페라에 비해 그리 자주 공연되는 작품은 아니다. 그의 중·후기 작품들이 워낙 유명한 탓도 있지만 기존 베르디 스타일과는 결을 달리하는 이 작품의 독특한 특성이 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특히 근래 우리나라에서 공연 기록은 국립오페라단이 지난 2013년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선보인 것이 주요 오페라 단체로는 마지막으로 알려져 있다. 이 또한 1995년 이후 18년 만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갖추지는 못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라 스칼라극장의 '팔스타프'를 보고 난 다음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ㅇ
라 스칼라오페라극장의 오페라 '팔스타프' 중 한 장면. /라 스칼라오페라극장
2024년 12월 7일, 라 스칼라극장은 24/25 시즌 개막작으로 소프라노 안나 넵트렙코가 주역으로 출연한 베르디 오페라 '운명의 힘'(La ferza del destino)으로 화려하게 시작했다. 그 뒤를 이은 공연이 '팔스타프'였다. 이 프로덕션은 1980/81년 시즌에 초연한 무대로 당시에는 로린 마젤이 지휘를 맡았으며, 가장 최근에는 리카르도 무티의 지휘로 2004년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때문인지 지난 18일 공연에서 무대와 의상은 매우 전통적이었고 요즘 빈번히 시도되는 레지테아터 연출 또한 없는 고전적인 무대였다. 그러나 다양한 변형과 응용의 끝에 다시 원본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자극적인 설정과 연출의 과도한 해석이 난무하는 요즘 오페라에 지친 눈에 더할 나위 없이 담백한 평안함을 안겨줬다.

오페라를 작품 그 자체로 즐기도록 한 일등 공신은 지휘자 다니엘레 가티와 라 스칼라오페라오케스트라였다. 가티는 막이 오르자마자 거침없는 속도로 음악을 시작해 관객들을 빠르게 몰입시켰다. 가티의 명쾌한 지휘에 따라 펼쳐진 음악은 현악의 유려함, 관악의 민첩함이 돋보였다. 화려하고 두터운 사운드를 들려주는 가운데 서정적인 여운마저 남겼다.

오페라 '팔스타프'는 베르디의 유작이다. 그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음악과 극의 유기적인 조화, 성악이 주가 아닌 관현악의 일부분으로 작동하는 등등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베르디가 바그너의 작곡 경향을 그대로 따랐다기보다는 변화한 시대정신과 20세기 오페라 작법에 대해 받아들이려 했다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 만년의 베르디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시도한 마지막 혁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날 오페라는 성악이 강조되는 것이 아닌, 관현악이 이끄는 오페라라는 '팔스타프'의 매력과 특징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가티가 만들어 낸 관현악 또한 베르디가 말하고자 한 그것을 표현하려 했다.

ㅇ
라 스칼라오페라극장의 오페라 '팔스타프' 중 한 장면. /라 스칼라오페라극장
이날 성악가들의 역량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팔스타프 역의 바리톤 암브로지오 마에스트리는 억지로 익살스러운 상황을 연출하지 않고 진정한 착각에 빠진 뚱보 기사를 진지하게 그려냄으로써 역설적인 웃음을 유도 했다. 포드 부인 역의 소프라노 로사 페올라, 미스 퀴클리 역의 메조소프라노 마리안나 피졸라토, 난네트를 노래한 소프라노 로잘리아 치드 등 각자의 개성과 역할에 충실했고 특히 앙상블에서 좋은 조화를 보였다. 이 밖에 남성 배역 또한 부족한 사람 하나 없이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했다.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폭의 전원 풍경화 같았던 이날의 무대였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연출가인 조르지오 스트렐러의 무대를 재연출한 공연에서 무대는 이태리 포강 유역의 평화로운 농가 풍경을 재현했고, 의상을 비롯한 모든 색감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한 듯 흐릿한 깊이감으로 부드럽게 은은하게 통일했다. 관객을 시각적으로 압도하지 않은 오페라에서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경험도 오랜만이었다.

밀라노에서 지극히 사랑받는 작곡가 베르디의 이 특별한 오페라는 근 20년의 간격을 두고 지난 45년간 세 차례 꾸준히 공연되었다. 새삼 온고지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오페라를 보면서 모처럼 느끼는 편안함과 든든함으로, 2025년 첫 관람을 시작했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

손수연
전혜원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