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편의 베르디 오페라 중 '팔스타프'(Falstaff)는 다른 오페라에 비해 그리 자주 공연되는 작품은 아니다. 그의 중·후기 작품들이 워낙 유명한 탓도 있지만 기존 베르디 스타일과는 결을 달리하는 이 작품의 독특한 특성이 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특히 근래 우리나라에서 공연 기록은 국립오페라단이 지난 2013년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선보인 것이 주요 오페라 단체로는 마지막으로 알려져 있다. 이 또한 1995년 이후 18년 만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갖추지는 못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라 스칼라극장의 '팔스타프'를 보고 난 다음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
오페라를 작품 그 자체로 즐기도록 한 일등 공신은 지휘자 다니엘레 가티와 라 스칼라오페라오케스트라였다. 가티는 막이 오르자마자 거침없는 속도로 음악을 시작해 관객들을 빠르게 몰입시켰다. 가티의 명쾌한 지휘에 따라 펼쳐진 음악은 현악의 유려함, 관악의 민첩함이 돋보였다. 화려하고 두터운 사운드를 들려주는 가운데 서정적인 여운마저 남겼다.
오페라 '팔스타프'는 베르디의 유작이다. 그는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음악과 극의 유기적인 조화, 성악이 주가 아닌 관현악의 일부분으로 작동하는 등등 바그너의 영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베르디가 바그너의 작곡 경향을 그대로 따랐다기보다는 변화한 시대정신과 20세기 오페라 작법에 대해 받아들이려 했다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다. 만년의 베르디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시도한 마지막 혁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날 오페라는 성악이 강조되는 것이 아닌, 관현악이 이끄는 오페라라는 '팔스타프'의 매력과 특징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가티가 만들어 낸 관현악 또한 베르디가 말하고자 한 그것을 표현하려 했다.
|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폭의 전원 풍경화 같았던 이날의 무대였다.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연출가인 조르지오 스트렐러의 무대를 재연출한 공연에서 무대는 이태리 포강 유역의 평화로운 농가 풍경을 재현했고, 의상을 비롯한 모든 색감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한 듯 흐릿한 깊이감으로 부드럽게 은은하게 통일했다. 관객을 시각적으로 압도하지 않은 오페라에서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경험도 오랜만이었다.
밀라노에서 지극히 사랑받는 작곡가 베르디의 이 특별한 오페라는 근 20년의 간격을 두고 지난 45년간 세 차례 꾸준히 공연되었다. 새삼 온고지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오페라를 보면서 모처럼 느끼는 편안함과 든든함으로, 2025년 첫 관람을 시작했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