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윤일현의 文香世談] 별이 빛나는 밤에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81801000914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8. 18. 18:05

2024081901050011907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아시아투데이는 매주 월요일 본란에 김정학(전 대구교육박물관장)의 박물관 이야기, 윤일현(시인)의 시 이야기, 김주원(큐레이터, 전 대전미술관 학예실장)의 명화감상 이야기, 그리고 신현길(문화실천가)의 지역문화콘텐츠 이야기를 매주 돌아가면서 싣는다. 이번에는 세 번째 '윤일현의 문향세담(文香世談)', 문학의 향기가 어우러진 세상 사는 이야기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경북 청송 주산지를 찾았다.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촬영지로 유명한 호수다. 올해 교직에서 은퇴한 M과 동행했다. "추억의 소설 알퐁스 도데의 '별'이 생각나요." 밤하늘을 한참 쳐다보던 M이 아련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추억의 영화'라는 말은 귀에 익지만, '추억의 소설'은 듣는 순간 낯설었다.

추억의 영화란 무엇인가? 1970~198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리칭이 주연한 홍콩 영화 '스잔나'를 기억한다. 주인공 스잔나는 뇌종양으로 죽는다. 이 영화는 주제곡과 함께 당시 젊은이들에게 리칭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에 나온 '러브 스토리'의 제니나 '라스트 콘서트'의 스텔라는 백혈병으로 삶을 마감한다. 그 시절 많은 여학생이 자기도 청춘영화 주인공들이 단골로 앓던 뇌종양이나 백혈병에 걸려, 영화 같은 애절한 사랑을 하다가 죽고 싶다는 철없는 상상에 빠지기도 했다. 나름대로 험난한 세월을 거쳐 왔다고 생각하는 동년배들은 특정 시기에 그들을 사로잡은 영화나 드라마, 대중가요 등을 추억하며 세대 동질감과 연대 의식을 느낀다.

M이 말하는 '추억의 소설'이란 같은 또래 모두가 동일한 느낌과 감동을 공유하고 있는 국정 교과서 수록 작품을 의미했다. "왜 그 소설이 생각났나요?" "지구는 펄펄 끓는 열을 주체할 수 없어 몸부림치며 신음하고, AI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인간의 길을 벗어난 것 같아요. 그러니 '별' 같은 순수한 사랑도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주는 감동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생생한데..." 그렇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가 문학사상 가장 인상적인 도입부라면, "나는 몇 번이나 별들 가운데서 가장 곱고 가장 빛나는 별이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 위에서 잠들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알퐁스 도데 '별'의 이 마지막 문장은 가장 아름다운 종결부라고 할 수 있다. 목동에게 스테파네트 아가씨는 최고로 아름답고 고귀한 별이다. 그 별이 길을 잃고 지상에 내려와 목동이 보살펴 줘야 하는 양이 된 것이다. 양치기는 별처럼 빛나는 아가씨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만으로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빛남과 고귀함을 상징하는 '별'과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는 '양'의 이미지가 아름답게 겹친다. 맑고 투명한 수채화 같은 소설이다. 프랑스 시골 목동의 이야기가 왜 우리 교과서에 실렸을까?
에리히 프롬은 시 두 편으로 '소유냐 존재냐(To Have or To Be)'를 설명한다. "갈라진 벽 틈에 핀 꽃이여/나는 너를 그 틈에서 뽑아내어, 지금 뿌리째로 손안에 들고 있다" 영국의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은 꽃을 꺾어 손에 쥐어야 만족감을 얻게 되는 '삶의 소유 양식'을 노래한다. "눈여겨 살펴보니/울타리 곁에 냉이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이누나!" 일본의 하이쿠 시인 바쇼는 꽃을 바라보면서 그 꽃과 자신을 동등한 생명체로 간주하며 꽃과 일체화를 소망하는 '삶의 존재 양식'을 보여준다. '별'은 소유하고 정복하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삶의 존재 양식'에 입각한 순결한 사랑 이야기이다. 국정 교과서에 딱 맞는 작품이다.

'별'은 19세기 중반 프랑스대혁명 이후 가톨릭 기반의 세계관과 도덕 기준이 무너진 후, 혼전순결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던 세태를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도데는 이 소설을 통해 순결한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도데는 상류사회에서 자유분방하게 사교 활동을 즐기다가 매독에 걸렸다. 이 또한 '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고통스러운 경험에서 벗어나려는 자의식과 순수하고 순결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이 소설을 쓰게 했는지 모른다.

빈센트 반 고흐는 알퐁스 도데의 작품을 열렬히 탐독했다. 그는 "별을 보는 것은 언제나 나를 꿈꾸게 한다"라고 말하며, "도데, 그가 묘사한 무한한 아름다움을 이해할수록 나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진다"라고 했다. 그는 도데의 '아를의 여인'을 정말 좋아해서 같은 제목의 연작을 그렸다. 조르주 비제 역시 도데의 이 희곡에 감동하여 곡을 썼다.

여름밤이 깊었다. 별들이 초롱초롱했다. 별은 꿈의 메타포이자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의 상징이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소용돌이치는 그 별들이 주는 경이롭고 신비한 힘이 느껴졌다. M의 핸드폰 스피커에서 돈 맥클린의 '빈센트'가 흘러나왔다. 정말 Starry, starry night였다.

이어 비제의 '아를의 여인' 제2 모음곡 중 미뉴에트가 호수로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감미로운 플루트 소리가 숲과 어둠을 포근히 감쌌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저 별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 모습 그대로 신화처럼 빛나고 있다. 한결같이 제 길을 가는 별들이 고마웠다. 별의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은하수가 폭포수처럼 쏴아 하며 쏟아져 내렸다.

/시인·교육평론가

윤일현 시인은…

영남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포항제철고 교사를 거쳐 교육평론가로 활동했다. '대구시인협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평생 '올바른 학습법'과 '책 읽기를 통한 미래의 길 찾기'로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명쾌하면서도 감동적인 글과 강연을 통해 '좋은 부모 되기 운동'을 30년 넘게 계속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시집 '낙동강', '낙동강이고 세월이고 나입니다' 등, 교육·인문학 저서 '부모의 생각이 바뀌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밥상과 책상 사이' '그래도 책 속에 길이 있다' 등 총 13권이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나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 콘텐츠' 도서 등에 4차례 선정되었다. '낙동강문학상'을 수상했다.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