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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치인들, ‘링컨과 처칠’의 리더십 본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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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4. 06. 2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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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식 한국전략문제연구소장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영국의 처칠 수상 두 사람이 압도적으로 손꼽힌다. 묘하게도 두 사람 각각의 리더십에 관한 책은 많이 출간되어 있으나 두 지도자 간 많은 유사점과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비교연구는 거의 없다. 두 지도자는 민주주의의 화신으로 불리지만 임기 내내 전쟁지도에 몰두해야 했다. 링컨은 남북전쟁에 그리고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에 전체 임기를 바쳐야 했다. 이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19세기와 20세기의 지도자를 대표하는 두 사람은 전쟁에서 승리했던 전시 지도자였다. 링컨은 시골에서 빈한한 집에서 태어나 법률가를 거쳐 정치인이 되었고 처칠은 공작의 손자로 군인이 되었다가 정치에 입문했다. 두 정치인은 80년의 시차를 두고 동일한 난관에 봉착했다. 각기 다른 사회적·경제적·직업적 환경에서 대통령과 총리로 선출되었지만 선출되자마자 국가 생존전쟁의 가혹한 현실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링컨은 전쟁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었으나 남북의 분리를 막기 위한 몸부림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고 노예제도 확장 반대와 폐지를 위한 전쟁을 수행하여 국가를 통합했다. 처칠은 히틀러가 프랑스를 침공하였던 1940년 5월 10일에 수상에 취임했지만 세계대전 지도 또한 큰 역경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1939년 9월에 해군장관에 임명되어 준비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취임 3주 후 두 사람 모두 최고사령관으로서 국가전략에 관하여 내각을 설득하여 전시 리더십을 정의하는 기준을 수립해야 했다.

◇두 지도자의 리더십 특징

첫째, 전쟁지도의 역량을 구비했다. 군사적 승리와 전쟁의 정치적 승리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하는 문제다. 결정적인 승리란 전쟁에서의 군사적 승리에 머물지 않고 정치지도자가 군사적 승리를 최대한 유효하게 활용하여 전후 영속적이고 유리한 평화를 확보한 때에 얻어진다. 두 사람은 전쟁 중에도 군사 전반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는 능력을 갖추어 평화를 지향하는 조건이 정리되었다고 판단되면 군부의 반대를 억누르고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켜 군사적 승리를 정치적 승리로 전환하는 역량을 발휘했다. 링컨은 북군 장군들의 경험축적을 오랫동안 기다렸고 처칠은 장군들의 역량을 결집시키고 대전략을 수립했다.
둘째, 대중을 설득하는 간결하고 탁월한 표현과 연설로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처칠은 간결하고 호소력 있게 연설을 끝냈다. 그가 졸업한 모교에서 교장이 장황한 소개를 하자 그는 "대의와 상식이 허락되는 한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한 문장으로 연설했다. 링컨의 2분 만에 끝난 게티즈버그 연설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지금까지의 어떤 민주주의에 관한 표현보다 간결하면서도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셋째, 두 지도자는 유머를 즐겨 사용했다. 이에 대한 일화는 무수히 많다. 그중 대표적인 것 하나씩만 든다면 다음과 같다. 링컨과 부인 메리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링컨이 변호사 시절 생선가게에서 메리가 주인에게 신경질과 짜증을 부리자 항의하는 주인을 보고 "나는 15년 동안 참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주인 양반은 15분이니 그냥 좀 참아 주기 바랍니다." 훌륭한 정치인의 자질에 대해 질문을 받은 처칠은 기자에게 "10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내다보고 자신 있게 예언해 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10년 후 자기의 예언이 틀렸을 때 그 이유를 지극히 합리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넷째, 정적을 대하는 태도 면이다. 의회에서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노동당 당수를 화장실에서 만나서 일을 보는데 처칠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일을 보았다. "총리 왜 날 피하시오?"라고 묻자 "당신들은 큰 것만 보면 '무조건 국유화해야 한다'고 하잖소?"라고 말했다. 링컨은 비판을 받으면서도 정적을 내각 주요장관에 등용하는 포용력을 발휘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고 자기를 무시했던 윌리엄 슈어드를 국무장관에, 체이스를 재무장관, 베이커를 전쟁장관에 기용했으며 끝내 그들의 존경심을 끌어냈다.

◇전쟁 종결 시 행동

남북전쟁과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지만 두 사람은 승리 후에도 복수를 보류하고 관대하게 대했다. 링컨은 남군들에게 총과 말을 휴대한 채 귀향하도록 허용했고 포로를 학대한 포로수용소장 1명을 제외하고 전범 처벌을 하지 않았으며 남부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의 교수형 집행을 반대했다. 처칠은 종전 직전 총선패배로 포츠담회담 도중 수상에서 해임되었다. 이는 대영제국 국민들이 노(老)수상을 위해 쉬라는 뜻이었다. 그는 수상직을 그만둔 후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을 집필하여 195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수상식에는 부인이 대신 참석했다. 그는 노벨상을 '위장된 축복'이라고 부인에게 말했다.

두 지도자는 반란과 침략에 굴복하기보다는 전쟁으로 맞섰다. 그들은 노예주인과 독재자와의 유화를 거부하고 국가를 위험한 길로 이끌었다. 링컨은 민주혁명에 늘 언급되는 인신보호령을 폐지시켰다. 나중에 다시 부활되지만, 전쟁기간에는 인권이 무시되었다. 대통령에게 인신보호령의 정지권이 있느냐의 여부는 계속 논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연방의회는 "현재의 반란이 계속되는 동안 미국 대통령은 공공의 안전이 요구한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언제든지 미국 전역 또는 일부 지역에서 인신보호령의 특권을 정지할 권한을 가진다"라고 결의했다.

처칠은 국민들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했다. 그리고 승리했다. 처칠은 "나는 지난 5년간 여러분에게 어려운 말은 했지만 여러분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온 세상이 안전하고 깨끗해질 때까지 흔들리지 않고 불굴의 믿음을 갖고 울지 않았다면 관대함을 느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려 깊고 확고한 결심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도자

두 지도자는 국가생존을 위한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승리는 큰 고통을 겪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링컨은 암살되었다. 그는 암살 징후가 있었음에도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이는 남북을 통합하는 제단에 스스로 희생물이 됨으로써 화해를 도모한 듯하다. 처칠은 나치에 대한 승리 없이는 생존이 불가함을 예견했고 전후 소련의 위협을 정확하게 예견하면서 '철의 장막'이라는 말로 냉전 시대의 도래를 예견했다.

처칠은 64년간 정계활동을 했지만 화를 잘 내고 절제력은 부족했으나 결심에 민첩했다. 링컨은 온갖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고 정치를 했다. 링컨은 신중하면서 사려 깊었다. 링컨은 오늘날 분단될 뻔한 미합중국을 구했고 처칠은 기울어져 가는 대영제국을 구했다. 난관에 봉착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면에서 위대한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 대한민국 정치인이 본받아야 할 지도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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