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인물평 좋고, 조용한 보좌역 역할 자족'
'반대표 1표, 왕치산 던졌을 가능성, 시 주석보다 못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외교 총괄하면서 사정 분위기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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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대 대표들은 왕 부주석이 시 주석과 상무위원단에 이어 투표함 앞에 서자 큰 소리로 환호하며 박수를 보냈다. 시 주석이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을 때 환호와 박수보다 컸다.
왕 부주석이 지난해 10월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 최고지도부 내부 인사규칙인 ‘7상8하(七上八下·67세는 유임하고 68세는 은퇴한다)에 따라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난 후 5개월 만에 화려하게 복귀한 것을 축하한 것이다.
이와 관련, 베이징 외교가에서는 ‘부패 문제로 처분을 받은 인사를 제외하곤 나쁘다고 평가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는 왕 부주석의 인물평도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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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 결과 2970표 가운데 반대표는 1표였다. 이날 만장일치로 국가주석과 중앙군사위 주석에 재선출된 시 주석보다 찬성표가 1표 적었다.
이와 관련, 한 외교 전문가는 “반대 1표는 왕 부주석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며 “자신이 시 주석에 비해 민심 방면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으로 왕 부주석이라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중앙기율위 서기로 지난 5년간 중국 반부패 사정을 진두지휘한 실세로 시 주석 권력강화의 최대 공신이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보좌 역할’에 자족하는 왕 부주석의 행보 때문에 나온 관측으로 해석된다.
왕 부주석의 귀환은 19차 당대회 이후 줄곧 예상돼왔다. 시 주석과 오랜 인연을 바탕으로 절대적 신뢰가 구축돼 있는데다 여러 업무 현안과 쟁점에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시 주석이 그를 다시 불러들일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특히 중국 헌법이 국가부주석의 직무에 대해 ‘주석을 보좌해 주석의 위탁에 따라 직권의 일부를 대행할 수 있다’고 다소 느슨하게 규정하고 있어 시대에 따라 권한과 역할이 다르다는 점도 왕 부주석 낙점 전망에 힘을 실었다.
전인대를 앞두고도 왕 부주석 선출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시진핑 2기가 출범한 이후에도 왕 부주석이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 집무실을 두고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는 설이 나오기도 했다. 결국 그는 지난 1월말 후난(湖南)성의 전인대 대표로 선출되며 복귀설을 확인했다.
왕 부주석은 산시(陝西)성에서 지식청년 생활을 시작했던 1969년께 하방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돌아가던 길의 시 주석을 숙소로 데려가 한 이불을 덮고 잤던 끈끈한 인연이 있다. 이 때 시 주석이 왕 부주석에게 경제 관련 서적 1부를 남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2006년 3월 시 주석이 저장(浙江)성 서기 시절, 베이징 시장이었던 왕 부주석을 베이징 저장성 주징반(駐京辨)으로 초대해 만찬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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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부주석은 중앙기율위 서기 이전 20여년 동안 경제·외교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와 2002년 중국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대유행 등 위기 때마다 ‘소방수’ 역할을 했고, 2009~2012년 부총리로서 미국과의 전략경제 대화를 이끌어 미국 외교가도 협상력을 인정할 정도로 노련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에 왕 부주석이 리위안차오(李源潮) 전 국가부주석이 맡았던 공산당 중앙외사영도소조 부조장을 맡아 외교 부문을 총괄하면서 미·중 간 최대 현안인 무역갈등 문제 해소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지금은 임시적 성격이 강한 중앙외사영도소조를 홍콩·마카오업무협조소조, 대만업무영도소조와 통합해 ‘외교사무위원회’로 상설화해 왕 부주석에게 보다 공식적인 직책을 부여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함께 반부패 사정에도 어떤 식으로든 관여할 수 있고, 시 주석으로의 권력집중으로 인해 다소 부실해진 당정 업무의 조정, 계파 간 조율의 역할도 담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