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총리 재지명, 시 주석에 여러 차례 충성 맹세, 제거 땐 정치적 부담 작용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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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권한은 이전 같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習近平)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오른팔로 경제통인 왕치산(王岐山·69) 전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전날 제5차 전체회의에서 국가 부주석으로 복귀했고, 시 주석의 경제책사 류허(劉鶴)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에게 경제 관할권 대부분을 넘겨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리 총리가 ‘무늬만 2인자’의 자리를 이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시 주석이 리 총리를 재지명한 것과 관련,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사상’ 삽입, ‘국가주석 2연임 제한’ 조항 삭제 등을 포함한 개헌으로 ‘숨겨진’ 비판 목소리가 있는 상황에서 당의 관례를 깨고 리 총리마저 내칠 경우 예상되는 정치적 부담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아울러 리 총리가 이미 여러 차례 시 주석에 충성 맹세를 한 것과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 주석이 쑨정차이(孫政才) 전 충칭시 서기에 이어 리 총리까지 내칠 경우 이들을 내세운 후진타오(胡錦濤) 전 국가주석 계열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와 함께 집권 2기에 경제·금융 분야에서 위기가 나타나면 경제를 책임진 리 총리에게 이를 물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리 총리는 2012년 제18차 전국대표대회(당대회)에선 시 주석에 이은 명실상부한 2인자로서 출발했다. 그러나 집권 1기 시 주석은 반부패 척결작업을 거치면서 절대권력으로 향해 달린 반면 리 총리는 상대적으로 주변에 권한을 대폭 이양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개헌으로 2022년 국가주석 3연임이 가능해진 시 주석이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리 총리의 ‘쇠락’은 눈에 띄게 분명해지고 있다.
리 총리는 안후이(安徽)성 딩위안(定遠)현이 고향으로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활동을 한 것이 정치 입문의 배경이 됐다. 1983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후 전 주석과 만나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리커창은 43세에 허난(河南)성 대리성장 겸 부서기로 임명돼 이듬해 최연소 성장이 됐다. 후 주석의 도움으로 2004년 랴오닝(遼寧)성 서기로 옮겨 정치실적을 닦았다.
이에 2007년 17차 당대회 이전까지만 해도 리 총리가 총서기, 시 주석이 총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17차 당대회에서 예상을 뒤엎고, 시 주석이 당 권력서열 6위 상무위원, 리 총리가 7위 상무위원으로 각각 선출되면서 운명이 바뀌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