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민, 통일 최우선 수혜자 선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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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 아시아투데이·코리아글로브
대담 일시 및 장소 : 2014년 11월 12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코리아글로브 사무실
[대담자]
조 민 통일연구원 연구본부장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
김규민 한마음프로덕션 영화감독
윤여상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소장
최홍재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진행- 최영재 아시아투데이 정치부 부장
[옥수수고개 17주년 좌담회를 열며]
옥수수고개는 보릿고개에서 따온 말이다. 대량탈북이 벌어졌던 두만강 쪽 함경도의 회령은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고향이라 평양 정권이 나름대로 신경을 쓰는 곳이다. 그러나 1997년 12월 24일 김정숙 생일에는 회령에서조차 사탕은커녕 배급까지 끊겨 비극이 극에 달했다.
그때 강 건너 중국 지린성(吉林省)에서는 짐승들이 먹는 사료용 옥수수가 대풍년이라 썩어서 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중국에 도와달란 말조차 하지않아 북한 동포 300만이 옥수수조차 먹지 못하고 원혼이 됐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이 비극을 부를 이름조차 짓지 못해 김정일이 책임회피용으로 만든 ‘고난의 행군’이란 ‘악마의 말’을 버젓이 쓰고 있다. 우리는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그 300만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 2500만 동포들의 목숨을 살려내는 유일한 방법, 통일대한민국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독자들에게 엄숙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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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제인 1997년 북녘의 대량아사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두 가닥인데 첫째는 1997년 이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실상과 평양 정권이 어떻게 대처했는지 이야기해 달라.
둘째는 대한민국은 어떻게 대처했는지, 1997년 이후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등 4개 정부를 지나오면서 무엇이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통일로 갈 것인지 말씀을 여쭙겠다. 먼저 1997년도 이북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김성민 “1994년에 북한에서 내가 있던 부대가 맡았던 지역이 평안도 안주였는데 굶어죽은 사람을 처음 봤다. 옆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가봤더니 넷이 엎드려있는데 다 시체였다. 사람이 그렇게 굶어죽을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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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북한에서 서서히 배급이 끊기기 시작해서 93년이 되면서 대도시의 도심이 흔들리게 됐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이 경제봉쇄를 해서 생산한 쌀을 옮기지 못한다고 둘러대더라. 휘발유가 없는 것도 남조선 괴뢰 때문이니 곧 풀린다고 말했다.”
김규민 “황해도 봉산이 고향인데 1996년에 이미 아사를 다 겪었다. 봉산군은 직원이 1만명 넘는 공장만 5개가 되는 인구 27만의 군이었다. 그런데 1997년에 주민증을 바꾼다고 인구조사를 하니 22만으로 줄어 있었다. 5만이 이유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이북은 우리처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공장 때문에 군인들도 많이 들어왔는데도 그랬다. 어쨌든 봉산에서 그냥 5만이 줄었다면 황해도 전체는 얼추 60만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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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정권을 받치는 기본이 군부인데 군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만난 오아시스가 김대중정부의 햇볕정책이었다.”
김규민 “황해도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1996년이 넘어가니 가까운 벗들마저 죽어나갔다. 98년이 되니 장티푸스인지 설사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왜 그랬겠는가. 결국 못 먹어 죽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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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평양 정권은 옥수수고개를 공포정치로 묻어버렸다. 1997년 김일성 동상에 똥칠을 하고 머리를 잘라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무렵 남포항에 남한이 보낸 쌀이 들어오는데 주민들은 구경도 못했다.
그리고 공개처형이 있었다. 공장에서 구리선 빼내 밀가루와 바꿔먹다 잡혀온 이들 등 봉산군에서만 한 달에 2~3번은 피바다가 펼쳐졌다. 남한이 보낸 쌀로 인해 이북에서는 손톱만한 민주주의의 싹마저 뽑혀버렸다. 평양 정권의 손발들이 쌀을 먹고 기력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
조 민 “1997년 무렵 300만 아사의 통계를 내고나서는 그 수치에 연구자들 스스로가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수치는 어림짐작이 아니라 당시 평화재단에서 한 해가 넘도록 국경지역에서 1천몇백명의 탈북동포들을 심층면접하고 여러 연구자들이 함께, 당시로서는 가장 객관적으로 통계기법을 적용해 나온 과학적 결과다.”
윤여상 “아사의 규모를 데이터로 보여줘야 하는데 북한이 사망자 수는 말하지 않으나 출생자 수는 밝힌 적이 있다. 이 수치와 현재 인구를 비교해보면 1997년 무렵 자연사 100만과 합병증으로 인한 사망을 비롯해 2~300만 정도가 사라진 것 같다. 이 사망자들이 모두 굶주림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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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대한민국이 지난 17년간 어떻게 했는지 평가하고 통일의 길을 얘기해달라.”
강철환 “우리가 이북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참사는 눈에 뵈지 않으니 아무 느낌도 없고 관심 또한 없다. 수용소에서 내 눈으로 본, 묻은 시신만 300구가 넘는다. 이북동포들은 날마다 그 고통을 뼈에 새기고 있다. 이를 이해하지 않고 동포들에게 다가가면 답이 없다.
학교 가서 이야기해보면 아무도 모른다. 특히 젊은 세대는 그 재앙에 무감각해서 앞으로 통합 과정에서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김규민 “한국에 왔을 때 남북은 형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남한 사람들에게 죽은 3백만은 물론 노예로 사는 2500만 동포도 그저 시끄러운 옆집 사람들에 불과했다.
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남북이 다시 만나면 가족이 아니라 이모저모 다 따지는 아주 정략적인 결혼식이 될 것이다. 그 통일이 바람직할까. 잇속만 따지는 통일대박론이 아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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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대박’을 하려면 이북동포들 마음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하늘이 준 절호의 때가 옥수수고개였는데 ‘절레 고개’가 되도록 만든 것에는 대한민국의 책임도 있다. ”
최영재 “남남갈등과 남·북한 사회통합에 관해 한 말씀 더해달라.”
최홍재 “남남갈등의 원흉은 김정일 정권이었다. 햇볕정책에 대해 애초부터 개혁개방의 뜻이 전혀 없었고 김정일 체제를 부양하려 했다는 시각이 있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평양 정권은 수령독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문제의 핵심을 놔두고 대한민국 안에서 진을 뺀 것이 지난 십수 년 동안의 남남갈등이다.
통일은 수령세습체제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다. 통일이 언제일까. 시나리오보다 더 꼼꼼한 콘티가 나와야 한다. 전략과 목표와 과제를 분명히 하고 이북동포들이 마음을 줄 남한의 정치집단을 만들어야 한다.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면 여기서라도 준비해야 한다. ”
김규민 “평양정권이 무너졌을 때 이북동포들에게 한국이 희망의 등대로 비쳐져야 한다. 그 바람직한 방법이 문화다. 북한 동포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미래를 상상한다고 한다. 그들의 꿈과 희망의 대상이 대한민국이 될 때 통일 충격파가 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최홍재 “‘우리가 통일하면 한국처럼 만들 수 있어’가 우리가 수습 가능한 표현일 것이다. 통일하면 이북동포들은 그 자리에서 제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 얼마나 걸릴지 참으로 꼼꼼히 따지고 도와야 한다.”
강철환 “남·북한 통일이 무엇이냐에 대해 말이 많지만 통일하고자 하는 까닭은 자유의 시스템을 북한에도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풍요를 공유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이북동포들에게 희망을 줘야 한다. 대북정책을 펼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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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민 “내년이면 분단 70년이 된다. 남·북한이 서로 체제를 성찰적으로 접근하고 점검해야 한다. 통일 담론은 올해 처음 시작됐다. 그 핵심은 전략과 비젼이다. 최근 우리를 돌아보면 통일 역량에 대한 국민 대부분의 자신감이 약화되고 있다.
통일 비전은 통일 코리아의 미래상이다. 국민들도 합의하고 지지해야 한다. 이북동포들도 비전에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북동포들의 합의와 결단이 중요하다. 북한 주민의 결단이 중요하다.
우리가 북한 주민을 책임져야 한다는 소명의식은 의미가 있다. 통일코리아의 비전을 마련해야 한다. 통일이 되었을 때 과거사를 묻지 않겠다는 합의가 돼야 한다. 북한 지도층에게 출구를 마련해줘야 한다. 북한 주민이 통일대한민국의 최우선 수혜자라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통일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