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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과거시험장에 나갔더니 꿈에 들은 문제가 나와 1~6구까지 꿈에 들었던 대로 쓰고 7~8구절을 추가하여 냈더니 병과 3등으로 합격하게 됐다고 한다. 그때 시험장에서 어사 박문수가 지은 등과시 ‘낙조(落照)’를 감상해보자.
“落照吐紅掛碧山(낙조토홍괘벽산 : 지는 해가 푸른 산에 걸려 붉은 빛을 토하고) 寒鴉尺盡白雲間(한아척진백운간: 찬 하늘에 까마귀는 흰 구름 사이로 사라진다) 問津行客鞭應急(문진행객편응급: 나루터를 묻는 길손은 말채찍이 급하고) 尋寺歸僧杖不閒(심사귀승장불한: 절 찾아 돌아가는 스님도 지팡이가 바쁘다) 放牧園頭牛帶影 (방목원중우대영: 놓아 먹인 풀밭에 소 그림자가 길고) 望夫臺上妾低?(망부대상첩귀환: 망부대 위엔 아내의 쪽 그림자가 나지막하구나) 蒼煙古木溪南路(창연고목계남로: 개울 남쪽 길 고목은 푸른 연기에 서려있고) 短髮樵童弄笛還(단발초동농적환: 더벅머리 초동이 피리를 불며 돌아오고 있구나)”
박문수는 실천으로 의(義)를 중시했고 허균은 홍길동이란 소설로 의를 중시했다. 면암(勉庵) 최익현(1833~1906)은 민(民)의 주도로 의를 중시했다면 박문수는 관(官)의 주도로 의를 중시했다. 마지막 두 구절은 박문수의 주관적 시정을 작문한 것이리라.
“개울가에서 한 세월은 다 보낸 고목이 젊었을 때의 기상을 품고 푸른 연기가 모락모락 난다고 상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목동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더벅머리 초동의 낭만적인 소감을 낙조의 풍경 속에 담아내고 있다.”
⑵ 조선최고의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황진이를 꼽는다. 어느 남자도 황진이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어느 시인도 그의 시 재주를 따르지 못했다. 그런데 황진이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을 학문적 스승으로 사모했다. 그래서 황진이·서경덕·박연폭포를 송도삼절이라고 부른다. 서경덕은 독실한 철학자요 시인이었다. 가난을 견디면서도 결코 부귀와는 손잡지 않겠다던 그의 시 한 편을 감상해보자.
“讀書當日志經綸(독서당일지경륜: 글을 읽을 때 비로소 큰 뜻을 품으니) 歲暮還甘顔氏貧(세모환감안씨빈: 가난의 쓰라림도 달게 받아진다) 富貴有爭難下手(부귀유쟁난하수: 부귀에 내 어찌 손을 댈 것인가?) 林泉無禁可安身(임천무금가안신: 산과 물에 포근히 안기고 싶다) 採山釣水堪充腹(채산조수감충복: 나물 캐고 고기를 낚아 그런대로 살면서) 詠月吟風足暢神(영월음풍족창신: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며 정신을 씻네) 學到不疑知快活(학도불의지쾌활: 나의 학문을 깨달아 즐겁기만 하니) 免敎虛作百年人(면교허작백년인: 어찌 이런 인생이 헛되다고 하겠나?)”
조선의 사회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많은 선비(학자)들은 돈이 없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재산이 없으면 그저 띠풀집이라도 좋다는 낙관론으로 살았다. 끼니가 어려워도 안빈낙도의 삶을 즐기며 올곧게 살았고 세상 부귀공명에 흔들리지 않았다.
격물을 중시했던 서경덕은 기철학의 체계를 세우는 학문방법을 세웠다. 채식을 즐기며 달을 감상하고 계절마다 바뀌는 바람을 쏘이면서 스스로 만족하겠다는 학자의 고매한 인품을 모든 학인(學人)들이 본받아야 되겠다.
소세양이 황진이와 시문을 주고받으며 한 달 간 계약결혼을 한데 반해 서경덕은 황진이가 그의 학문에 탄복해 여인의 자존심까지 버려가며 구애를 했지만 끝내 거절했던 것이 크게 대비된다. 철학자였던 서경덕은 그만큼 지조 높은 선비였다. 가난의 쓰라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바라보는 높은 비전과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그의 생애는 오늘날 시류와 작은 이해관계로 방황하는 젊은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점이 크다. 나 자신부터 좀 더 고상한 인생지표를 설정한 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
위 내용은 한국한문교육연구원의 장희구(張喜久) 이사장의 한시 번안 자료에서 얻은 것이다. 이 시대엔 온고지신(溫故知新) 단계를 넘어 온고창신(溫故創新)을 해야 창조경제와 행복경영이 가능할 것이다. 너무 생업에 직결된 기술과 경영에만 쏠려 가는데 대해 한 발쯤 뒤따르면서 옛날 선비들의 지혜도 살펴보아야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