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강성학 칼럼] 아직도 거짓된 레닌(Lenin)의‘인민 민주주의’인가?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www.asiatoday.co.kr/kn/view.php?key=20240918010010026

글자크기

닫기

 

승인 : 2024. 09. 18. 17:33

2024090401000451600027021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블라디미르 레닌의 '국가와 혁명(State and Revolution)'은 전 세계에 걸쳐 '인민 민주주의(people's democracy)'의 옹호자들을 위한 고전적 지주를 제공했다. 그런 정치체제들의 정치적 정의에 관해 이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단순히 공산당의 독재로 대체했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민주주의 이상이 본질적으로 모순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레닌은 노동자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개념을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단순한 대안으로 제시했다. 레닌은 의회 민주주의를 자본주의 사회가 존재하는 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들이 미디어와 선거운동의 자원과 같은 정치적 활동의 수단에 특권적 접근을 제공하는 압도적인 부를 소유할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규탄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되고, 그리고 부르주아들이 비록 일반선거권,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있고, 그리고 계급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정치적 특권들을 제거한다고 할지라도 국가에 자기들의 이익을 강요할 수 있는 지배계급이 된다. 다수의 지배가 실제로는 소수의 지배를 감추는 스크린인 의회 민주주의를 대체해야 하는 것은, 레닌에 의하면, 노동계급이 그 자체의 구성원들에 제한된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적 지배를 행사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the dictatorship of proletariat)이다. 비록 이것이 다른 계급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를 배제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회주의 사회는 물론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들이 압도적으로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다수의 지배를 확립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더 나아가서 노동 계급은 하나의 특수 계급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이익은 본질적으로 보편적인 것이며 계급간 구별의 제거, 국가의 소멸, 그리고 계급없는 공산주의 사회의 출현 외에 다른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특수한 사회적 이익의 수단으로 보편적 지배의 과시를 이용하여 정치적 정의를 위반하는 반면에 노동자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를 실현함과 동시에 정부를 적합하게 보편적인 특수한 사회적 이익에 복종시킴으로써 정통성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아니다.

레닌의 주장에서 치명적인 결함은 노동자 민주주의가 공산주의 혁명적 목적과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레닌은 국가가 사회에 대하여 강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특권적 제도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본질적으로 순전히 도구라고 주장했다. 그 자체로서 정치란 목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체를 위한 권력이란 공허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란 독립적으로 결정된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봉사함으로써 그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레닌이 계급이익으로 추적하는 목적이란 결국 마르크스의 경제적 결정으로 주어지는 계급이익일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는 정치권력의 힘으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도록 허용하는 계급 지배의 도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정치란 그 자체의 정당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국가는 없애야 할 본질적으로 지배의 부당한 제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목적은 정의로운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계급 분할을 제거하고 그에 따라 모든 국가의 토대를 제거해 버린다.

이것은 노동자의 민주주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계급 분할의 경제적 토대를 진보적으로 결정하는 그런 사회적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공산주의 사회로 가는 길을 따르는 정도만큼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가 그것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가 있는 한 그런 정책을 자동적으로 실행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혁명의 목적이 정치적 자유의 어떤 행사와는 독립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의해서 이미 규정되었기 때문에 마르크시즘의 구제불능의 진리로 교육된 혁명적 전문가들의 지배가 아마도 어떤 경우에도 더 의존할 만할 것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레닌이 노동자 민주주의를 다수지배의 진정한 형태라고 정당화하려고 모색하는 만큼 그가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에 목적론적 헌신을 유지하는 한 자유로운 통치를 허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결과 레닌은 루소와 플라톤으로부터 균등하게 빌려오는 해결책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다. 루소가 인민들이 이성에 호소하도록 입법가와 시민종교를 도입하고 그리고 플라톤이 백성의 좋은 삶을 가르치기 위해 공동체의 철학자들을 수호자로 만들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를 지도하기 위해 혁명 전위대의 역할과 이데올로기를 불러냈다. 혁명의 목적이 노동자 민주주의나 어떤 형식의 정부가 아니라 마르크시스트 과학으로 알려진 공산주의 사회인 것이다. 레닌의 혁명 전위대는 일반 당원들에 의해서 통제되는 대중정당일 수가 없고 그래서 그들의 임의성에 복종할 것이다. 그 혁명 전위대는 오히려 그 구성원들을 혁명의 진정한 수호자들이 되도록 목적이 지워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교육된 정치적 엘리트들이 되어야만 한다.

국가권력을 장악하기에 앞서 혁명 전위대인 공산당은 노동계급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설득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런 목적을 향해서 전위대는 프롤레타리아가 '과학적 사회주의'의 합리적 이해보다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에 더욱더 민감하도록 회유하기 위해 시민종교와 같은 대중노선을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 후엔 전위대 공산당은 루소의 힘없는 입법자를 넘어서는 지위에 있게 되어 플라톤의 지배계급과 같은 역할을 채택할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의 '합리적으로' 규정된 목적을 달성한다는 지상명령하에서 공산당은 어떤 헌법적 의회나 노동자 소비에트, 혹은 노동조합운동에 대한 복종으로부터 그 자체를 자유롭게 할 수밖에 없으며 공산주의로 이행해 나아가기 위해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노동계급의 사회적 자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도 제한하는 데 경계심을 잃지 않으면서 그 자체가 사회와 국가에서 궁극적인 결정자가 될 수밖에 없다. 볼셰비키들이 노동자의 소비에트와 노동조합들을 박멸한 이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런 역사가 된 그 결과는 노동자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지배 사이에 멈출 수 없는 갈등만을 증언했다. 자유주의적 원칙들은 정치적 자유가 없이도 실현될 수 있는 반면에 공산주의의 미래는 민주주의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국가를 이미 정해진 사회적 목적의 가처분할 도구로 전락시킴으로써 레닌과 그의 추종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 정치적 자유의 모든 이유를 약화시켜 버렸다.

노동자들의 국가를 만회하려는 듯 레닌이 기다린 공산사회의 질서를 언뜻 제공할 때 그리고 노동일, 시장, 계급들 그리고 국가가 모두 대체되어 버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레닌이 암시한 것처럼 습관만이 타인들과 조화 속에서 개인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을 취할 것임을 확실히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습관이 미덕의 산파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선택할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어떻게 습관이 정치적 권위의 지배수단에 의존함이 없이 어떤 형태의 정의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인간이 시장과 국가가 없는 종(species)으로 전락한 곳에서, 즉 연계된 생산자들의 사회적 및 정치적 진공상태에서 남는 것은 순전히 사적인 취미 활동일 것이다. 그것이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장했듯이 오전에 낚시를 하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철학을 하든 뭘 하든 간에 말이다. 역사가 종말을 맞은 바로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다른 어떤 공적 노력만큼이나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만일 민주주의가 옹호되어야 한다면 레닌의 길을 따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의 실패는 직접적으로 민주주의를 가리킨다. 레닌의 본보기는 민주주의의 정당화를 암시하는 것은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자유란 독립적으로 결정된 목적들로 가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적 과정이란 국가가 그 자신의 민주적 작동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수정할 수 없는 헌법적 규정에 의해서 묶여 있어야만 한다. 민주주의의 원칙인 다수의 통치에 고유한 임의성 앞에서 합헌성(constitutionality)이 민주적 정책결정을 제한하고 그것의 규범성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합헌성에는 두 가지 지상명령이 달려있다. 첫째로, 다수의 지배 그 자체는 다수가 민주주의를 유지할 것이라는 보장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적 자유를 존중하고 보존하기 위한 민주적 결정을 요구하는 헌법적 규정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그 자신의 원칙을 위반할 지위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다수의 지배는 다른 정의의 관계를 존중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민주정부는 민주적 지배뿐만 아니라 그 민주적 지배의 모든 정당한 활동과 제도를 인정하고 시행할 의무를 갖게 하는 규정들이 헌법에 있어야 한다. 비록 이 두 가지의 지상명령이 뚜렷한 정치적인 영역과 비정치적인 영역을 가리키지만 그것들은 정의의 비정치적 관계의 유지 그 자체가 정치적 자유의 행사를 위한 전제조건이 되는 정도만큼 합쳐질 수 있다.

민주주의하에서 만일 루소의 일반의지처럼 입법부가 법을 제정하고 그것들을 집행하는 일까지 모두 다 한다면 합헌성은 현실성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헌법을 위반했던지 간에 그것이 만든 법을 합헌적이라고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만일 권력분립이 존재한다면, 헌법적 기대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것이 원하는 무슨 법이든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민주적 입법부가 모든 헌법적 정부의 제한을 사실상 모두 제거하고 다수의 의지가 정의의 어떤 법률에도 부합하지 않게 만들 것이다. 물론 행정부가 다른 부처와 결탁하여 절대적인 지배를 꾀할 위험성도 항상 존재한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권위주의적 정권이나 독재정권 혹은 제왕적 대통령제라 부르기도 한다. 만일 민주주의가 합헌성을 향유하려면 확실한 권력분립에 따라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레닌의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는 제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결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주의자들은 왜 자신들을 인민민주주의자라고 내세우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모순 덩어리인 인민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쟁취하려는 투쟁에서 인민민주주의보다 더 유용한 수단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를 제거하고 '민주주의'만을 사용함으로써 '인민 민주주의'와 근본적 차이를 제거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 간의 근본적 차이로 인해 그들은 그런 그칠 줄 모르는 투쟁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보다 유용한 대안적 수단을 발견할 때까지는 광신자처럼 자신들의 목적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오히려 더욱더 그 투쟁에 집착하는 성질을 보일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

댓글 작성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