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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숙청의 역사, 46년만에 재현된 종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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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형 기자

승인 : 2013. 12. 11. 13:56

* 장성택 숙청, 56년 종파사건, 67년 갑산파 숙청과 비교...노선, 권력투쟁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8일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숙청 사실을 전하면서 “분파책동으로 자기세력을 확장하고 감히 당에 도전해 나서는 위험한 반당·반혁명적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고 보도했다.

북한에서는 ‘8월 종파사건’으로 알려진 1956년 연안파·소련파 숙청과 1967년 3월에 시작된 갑산파 숙청이 대표적인 종파사건으로 꼽힌다. 모두 김일성 시대에 일어났다. 장성택 숙청은 46년만에 재현된 일대사건이다.

종파사건에는 노선투쟁을 형식으로 하고 권력투쟁을 내용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종파사건을 거치면서 북한의 권력구조가 급변하고 국가노선이 확정됐다. 종파사건이 북한 역사에서 분수령이 된 이유다. 장성택 숙청이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 1956년 ‘8월 종파사건’ … 집단지도체제 시도 무산

북한 사상 첫 종파사건인 ‘8월 종파사건’은 1956년 김일성이 원조 요청차 구소련과 동유럽을 방문하는 틈을 타 연안파와 소련파가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촉발됐다.

한국전쟁 이후 복구 문제, 특히 산업 발전 방향을 두고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 세력과 대립하고 있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는 경공업 위주의 전후 복구를, 김일성 친위세력과 갑산파는 구소련식의 중공업 위주의 복구를 주장했다.

노선투쟁은 곧 권력투쟁이 됐다. 당시 김일성은 내각 수상직에 있었고, 연안파의 최창익은 부수상 겸 재정상을, 소련파의 박창옥은 부수상 겸 기계공업상을 맡고 있었다. 권력 핵심에서 밀려나고 있던 연안파와 소련파는 김일성의 독주를 막고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가 그 무대가 됐다. 최창익·윤공흠·서휘 등 연안파가 전면에 나서서 김일성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대비하고 있던 김일성 세력에 의해 도리어 반격을 당했다.

김일성 세력은 회의에서 먼저 연안파를 비판하고 나섰고, 뒤늦게 단상에 올라 김일성을 비판하던 윤공흠을 억지로 끌어내렸다. 윤공흠, 서희 등 연안파는 회의장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탈출했다.

연안파를 전면에 세우고 한발 물러서 있던 소련파는 군부를 장악한 김일성 세력의 반격에 침묵했지만 결국 연안파와 함께 숙청 당했다.

급히 귀국한 김일성은 중국과 구소련의 압력에 잠시 숙청의 고삐를 늦추는 듯했지만 양국의 공산권 헤게모니 싸움을 틈타 강도 높은 ‘반종파투쟁’을 벌였다.

1957년 중반까지 김일성의 반대세력 200여명이 숙청됐고, 한국전쟁의 패전 책임을 뒤집어쓰고 재판을 받고 있던 남로당의 거두 박헌영에 대해서도 이 시기 비공식 사형이 집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판 김일성저작집에 따르면 김일성은 1957년 12월 5일 당 중앙위원회 확대전원회의에서 “그들은 지난날 우리 당이 거둔 모든 성과를 부인하고 당의 영도를 거부하였으며 당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반대하고 무원칙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표방하였으며 심지어 종파유익설을 부르짖으며 적대적 요소들과 결탁하거나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참을 수 없는 비계급적 행동까지 감행했다”고 말했다.

또 “본래부터 불건전한 사상적 교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종파분자들은 한편으로는 외부로부터 침습한 국제수정주의의 사상적 영향에 사로잡혔으며 다른 편으로는 간고한 혁명투쟁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적대세력 앞에 굴복하는 우경투항주의에 빠져 들어가 드디어 당과 혁명을 배반하는 길로 나가게 됐다”고 했다.

동유럽식의 집단지도체제 구축을 시도했던 연안파와 소련파의 쿠데타는 종파주의라는 낙인이 찍힌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후 북한은 김일성 유일체제와 주체사상이 지배하는 길로 들어섰다.

◇ 1967년 ‘갑산파 숙청’ … 김일성 유일체제 확립

8월 종파사건이 김일성 유일체제의 계기가 됐다면 1967년에 시작된 갑산파 숙청은 김일성 유일체제를 확고히 했다.

김일성의 친위세력인 만주 빨치산파와 함께 연안파와 소련파를 몰아낸 갑산공작위원회 출신의 국내 공산주의자들, 이른바 갑산파는 1966년 이후 김일성의 국방·경제 병진노선을 두고 김일성 친위세력과 대립했다.

갑산파의 김도만 당시 당 선전담당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은 인민경제 우선정책을 주장했고, 기업소에서 당 일꾼의 역할을 줄이자며 김일성의 ‘대안의 사업체계’와 ‘청산리 방법’에도 반대했다.

그는 갑산파의 중심인물인 박금철 당시 내각 부수상을 위해 ‘일편단심’이란 선전영화까지 만들면서 갑산파의 권력 강화를 시도했다. 김일성의 후계자로 떠오르던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견제하는 목적도 있었다.

김일성은 1967년 3월 비밀리에 당 중앙위 4기 15차 전원회의를 열어 갑산파 숙청을 결정했다. 당의 유일사상체계에 반한다는 명목이었다. 북한에서 갑산파가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로 불리는 이유다.

갑산파에 대한 숙청은 회의 직후 시작돼 다음해까지 계속됐다. 1968년 중반 지방의 중견간부 3분의 2 정도가 숙청될 정도로 규모도 컸다.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으로 평가받는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김일성에 대한 ‘수령’ 호칭도 이때 시작됐다.

갑산파 숙청 과정에서 김영주와 김정일은 김일성 개인 우상화 경쟁을 벌이면서 권력투쟁을 벌였다. 갑산파 숙청이 김일성 부자 권력 세습의 계기가 된 셈이다.

북한의 경제는 국방·경제 병진노선에 의해 기초가 취약해지면서 1970년대 세계적인 석유파동에 휘청거렸다. 이후 경제침체가 장기화된다.

국방·경제 병진노선은 갑산파 숙청에 따른 북한 내부의 동요와 맞물려 북한의 대남 모험주의로 이어졌다.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 2013년 ‘장성택 숙청’ … 북한 역사의 새로운 분수령 될까

2013년 12월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한 장성택 숙청 사건과 8월 종파사건·갑산파 숙청 사이에는 최소 46년의 세월이 놓여 있다. 종파사건 특유의 공통점도 있지만 세월만큼의 차이도 있다.

노동신문은 8일 “반당·반혁명적 종파사건이 발생했다”면서 “장성택 일당은 당의 통일단결을 좀 먹고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저해하는 반당·반혁명적 종파행위를 감행하고 강성국가건설과 인민생활향상을 위한 투쟁에 막대한 해독을 끼치는 반국가적, 반인민적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전했다. 

노동신문은 “장성택을 제거하고 그 일당을 숙청함으로써 당 안에 새로 싹트는 위험천만한 분파적 행동에 결정적인 타격을 안겼다”고 보도했고, 같은 날 조선중앙TV는 장성택의 체포장면까지 화면에 내보냈다.

장성택의 숙청에는 노선투쟁과 권력투쟁 요소가 모두 포함됐다. 전형적인 종파사건이라는 의미다. 부정부패 행위나 도덕적 해이 등도 거론됐지만 이는 흔히 사용되는 숙청 이유다.

일각에서는 장성택 숙청이 갑산파 숙청에 비견될 정도로 북한 내부에 큰 파장을 미치겠지만 김정은 유일체제의 공고화로 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과거 종파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반대의 주장도 있다. 김정은 체제의 기반이 아직 취약한 만큼 체제 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만주 빨치산파 같은 강력한 친위세력이 없고 국제환경도 유리하지 않다는 것이 근거로 제시된다. 김일성 시대 두 차례의 종파사건 당시 김일성은 중·소갈등을 최대한 활용했다.

송병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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