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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중로상봉’(中路相逢) 정신 되살리는 한가위 됐으면

[칼럼] ‘중로상봉’(中路相逢) 정신 되살리는 한가위 됐으면

기사승인 2024. 09. 1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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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석호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음력 팔월 보름날에 맞는 한가위는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한 유서 깊은 명절이다. 추석(秋夕)이란 말보다 더 정겹다. 이맘때 오곡백과가 영근다. 여름철 땀 흘려 지은 농사가 열매 맺어 즐기는 일만 남았기에 '5월 농부 8월 신선'이란 말도 생겼다.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등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먹었다. 먹을 게 모자라던 시절에도 인심이 넉넉했다. 한가위에는 '민족의 대이동'으로 친지들이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차례를 지냈다. 고향 가는 길이 평소보다 몇 배 더 걸려도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올해 추석은 마음이 그리 가볍지만은 않다. 전통시장 상인들은 추석 대목경기가 실종됐다고 울상이고, 연이은 장마와 폭염 탓에 배추와 무, 시금치 등 채소가격이 고공행진을 이어가 서민들은 장보기가 겁난다.

특히 반년 넘게 '의대 증원'을 둘러싼 정부와 의협 등이 벌이는 '의정(醫政) 갈등'은 서로 자존심 대결과 백기투항을 요구하며 벼랑 끝 승부로 인해 국민들의 가슴은 타들어가고 있다. 당장의 의료공백에 대한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는 일이 우리 정치의 임무요, 히포크라테스의 후예를 자임하는 의사들의 책무임에도 이들은 정작 국민들의 불안과 불편함은 안중에 없는듯해 실망을 넘어 분노가 폭발직전이다.

그나마 한 가닥 희망적인 것은 최근 정부와 여당이 의대증원 등 의료계 현안을 두고 야당, 의료계 등이 참여하는 '여야의정 협의체'를 꾸리자고 제안하고 대통령실도 우호적인 반응을 보이며 2026년도 의대 증원 규모를 조정할 수 있다고 밝히면서 실낱같은 해결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의료계는 원점 검토 등을 요구하며 정부의 진정성을 의심하고 있어 한번 꼬인 매듭이 쉬 풀리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어디 국민들 복장 터지게 하는 일이 이뿐인가. 이른바 '민의의 전당' 국회에서 상대방을 향해 걸핏하면 터져 나오는 시정잡배 같은 막말과 고함, 삿대질, 그리고 '아니면 말고' 식 무책임한 의혹 제기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막무가내 식 완력 과시에 진절머리가 난지 오래다. 여기에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일각에서 제기한 느닷없는 '계엄 음모' 이슈, 숱한 특검 발의와 탄핵 연계 남발 등은 꼴 볼견이 아닐 수 없다. 그런가하면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은 피켓시위와 망신주기 등을 이유로 국회 개원식에 1987년 민주화 이후 최초로 불참하기까지 했다. 이미 다섯 차례나 충돌한 대통령과 여당 대표, 여권 투톱의 불화까지 겹치는 등 집안 분란도 빼놓을 수 없다.

대통령 지지율은 87년 민주화 이후 같은 기간의 역대 대통령에 비해 최저이고, 고착화되는 모양새다. 이런 와중에 민생정치는 실종되다시피 된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는가. 이번 추석기간 동안 팍팍해진 일상의 무게를 툭툭 털어내고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느끼면서 에너지를 재충전, 분위기 반전(反轉)을 통해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 선조들의 한가위 세시풍속(歲時風俗) 중 하나인 '중로상봉(中路相逢)'의 지혜와 정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중로상봉(中路相逢)'은 '중로(中路)보기', 특히 '반(半)보기'로도 불렸다. '반보기'의 뜻은 원래 추석 무렵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시집간 딸과 친정어머니가 두 집 사이의 중간쯤 되는 산이나 시냇가 같은 곳에서 만나 장만해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회포를 풀던 풍속을 일컫는다.

'반(半)보기'의 어원은 친정과 시댁의 중간지점이라 반(半), 보고 싶은 가족을 다 만나지 못하니 반(半), 하루 중 반(半)나절밖에 못 만나고, 눈물이 앞을 가려 얼굴이 반(半)밖에 안 보여서 이렇게 불리어졌다는 얘기다.

유학(儒學)을 신봉하던 조선시대 전통적인 가족제도 아래서 여자는 한번 시집을 가면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 하여 친정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요즈음과 달리 길이 험하고 교통수단이 여의치 않으니 친정 한 번 가려면 큰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추석 명절에 친정 나들이의 '절반의 꿈'을 마련한 조상의 슬기가 새삼 놀랍다. '반보기'는 엄혹한 현실에서 한 줄기 시원한 바람 같은 한가위다운 일종의 '숨통트기'이자, '나눔'과 '친교(親交)'의 장(場)일 것이다.

이 '온보기'가 아닌 '반보기'에서 온전히 한 쪽에서 모든 것을 부담하거나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절반씩 나아가고 물러서는 '양보(讓步)'와 '절충(折衷)'의 정신을 읽는다.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이런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바로 '중로상봉'의 정신이 아닐까.

우리 사회는 이념(理念)과 계층(階層), 노사(勞使), 세대(世代), 빈부(貧富)간 갈등이 전에 없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번 추석은 여러 가지로 힘들고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마음과 온정만큼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처럼 진정으로 서로 나누고 양보하는 '화합(和合)의 한바탕 축제'가 됐으면 좋겠다. 그것이 선인(先人)들의 '반(半)보기'와 '중로상봉(中路相逢)'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류석호 칼럼니스트, 전 조선일보 영국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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