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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욱 칼럼] 계엄령과 국가 신인도

[이경욱 칼럼] 계엄령과 국가 신인도

기사승인 2024. 09. 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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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대기자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직전인 1997년 말 당시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 차관실. 외환보유고가 곤두박질치면서 재경원 직원들은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외환시장 동향을 살피고 미국 등 우방국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기에 바빴다. 강만수 차관 역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필자 역시 거의 매일 차관실에 들어가 취재를 했다. 그때마다 강 차관은 육두문자를 써가면서 얼굴을 붉혔다. 교회 다니는 분이 왜 욕을 하느냐고 물으면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하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국가신인도·외평채·무디스·S&P…. IMF 구제금융을 받기 전까지 우리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극히 생소한 용어들이다. 취재진과 정부 관계자 모두가 당시 환율과 외평채 동향에 매일 신경을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환율·외평채 가산금리표를 늘 가슴에 품고 다녔다. 재경원 관리들은 외평채 가산금리가 급등하면 눈에 불을 켜고 그 원인을 찾고 가산금리를 떨어뜨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기자들 역시 외평채 가산금리 동향을 수시로 체크해 가산금리가 오르면 곧바로 속보로 처리하곤 했다. 우리는 연약했기 때문이다. 그 서슬 퍼런 IMF 체제 이전에는 경제 관련 부처 또는 금융권 일부에서만 주로 신경을 썼을 것이다. IMF를 전후해 수많은 기업이 부도 처리되는 등 경제가 불안하거나 정정이 흔들릴 때 어김없이 외평채 가산금리는 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외평채는 여전히 나를 노심초사케 하는 용어로 마음속에 남아 있다.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의 줄임말인 외평채는 통화 가치의 안정을 도모하고 투기적인 외화 유출입에 따른 외환시장의 혼란을 방지하려고 정부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외환시장에 개입, 외환을 매매하기 위해 조성한 기금이다. 미국은 환율안정기금(Exchange Stabilization Fund), 영국은 환율평형기금(Exchange Equalization Fund)을 각각 운용하고 있다. 미 재무부채권(TB) 금리를 기준으로 위험도에 따라 가산금리가 붙는다. 가산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과 국가 신인도가 그만큼 떨어지는 셈이다.

외평채와 함께 가장 많이 신경을 쓴 용어는 국제신용평가사였다. 3대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스탠더드앤푸어스(S&P)·피치IBCA의 국가 신용도 평가는 특정 국가나 기업의 흥망을 결정짓는 잣대였다. 국가 신용도 하락은 곧바로 국가 부도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정부나 기업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IMF 체제에서 점점 벗어나면서 신용도가 상승세를 타면서 우리나라의 분위기도 호전됐다. 지금 우리의 신용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외평채 가산금리나 국가 신용도에는 특정국의 정정 불안이 주요 평가지표로 사용됨은 물론이다. 정치가 안정돼야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되고 그래야 신용도가 상승하게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우리나라는 IMF 체제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구가하면서 지금은 세계 10대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했다. 각종 경제지표는 우리 경제의 역동성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반도체·자동차 등 주력 산업은 선전하고 있다. 자동차는 세계 2위를 넘보고 있다. 내수 부진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모든 산업에서 골고루 글로벌 경쟁력을 탄탄히 갖춰가고 있다.

그런 마당에 난데없는 등장한 '계엄령'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수십 년 전 나라가 혼란에 빠졌을 때 내려졌던 계엄령을 지금 듣게 되는 것은 정말 난센스다. 계엄령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국가 신인도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계엄령 소문이 도는 나라의 국가 신용도는 급격히 하락하기 마련이다. 신용평가사들은 주요국에 사무소를 두고 해당국 정치·경제·사회 동향을 면밀히 살펴 주기적으로 신용등급을 조정한다. 이 때 정정 불안은 경제 불안과 직결된다. 불안을 느낀 외국인 투자자들이 손을 털기 시작하면 그 나라는 국가 부도의 위기로 내몰리게 된다. 신용등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명확한 근거 없이 계엄령 선포 가능성을 제기하고 나선 것은 그래서 국익을 해치는 일이다. 국가 신인도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코리아 디스카운트' 얘기로 이어진다. 지금은 덜하지만 과거에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면 주가가 급락했었다. 우리의 주식시장이 불안한 여러 요인 중 안보 불안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경제 상황으로 볼 때 주가가 더 올라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바로 안보 불안에 따른 코리아 디스카운트 때문이리라.

치열한 글로벌 경쟁과 내수 경기 침체를 극복할 수 있도록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외국인 투자 이탈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는 계엄령 발언은 그래서 온당치 않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정치는 집권이 목적이고 집권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다. 야당은 태생적으로 여당을 곤혹스러운 상황으로 몰고 가려고 애쓰는 존재다. 그렇다고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 그건 바로 국익(國益)이다. 대명천지에 느닷없이 군부를 끌어들이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다. 국가가 있어야 국민도 있고, 정당도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말고 식의 장난은 국익을 근본부터 뒤흔들고 훼손하는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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