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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에이브러햄 링컨: 고결한 인품의 천재적 리더십 <상>

[강성학 칼럼] 에이브러햄 링컨: 고결한 인품의 천재적 리더십 <상>

기사승인 2024. 08. 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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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천재에겐 롤 모델이 없지만 영웅에게는 롤 모델이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천재였지만 그에게는 조지 워싱턴이라는 "큰 바위 얼굴" 같은 롤 모델이 있었다. 그 후 미국 내외에서 많은 야심적 정치가들은 오히려 링컨을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다. 워싱턴이 미국의 창업에 성공한 지도자였다면 링컨은 수성에 성공한 지도자였다. 링컨은 워싱턴에게 일종의 청출어람이었다. 그 후 링컨은 20세기 초 제 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에서 21세기 제44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여러 명의 후임자들이 그를 롤 모델로 삼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링컨에 이어 러시모어 바위산에 그의 얼굴을 새김으로써 링컨의 청출어람에 다가섰지만 그 후 아직까지는 누구도 그에 버금가지 못했다. 그만큼 링컨의 리더십은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링컨의 전기 작가인 역사학자 도리스 컨즈 굿윈(Doris Kearns Goodwin)은 링컨을 "정치적 천재(political genius)"라고 평가했다. 그녀에 의하면, 링컨의 정치적 천재성은 과거의 정치적 경쟁자들과 우정을 수립하고, 항구적 적대감으로 확대될 상처받은 감정을 치유하고, 하급자들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지면서도 성공에 대해선 그 공헌을 공유하고, 그리고 실수로부터 배우는 개인적 특징으로 나타났다. 링컨은 동시에 군사적 천재(military genius)였다. 미국의 저명한 링컨연구가인 데이비드 포터(David M. Porter)는 만일 남부의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와 북부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서로 상대 쪽의 지위에 있었더라면 남부가 승리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북부군 총사령관으로서 링컨 대통령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처음으로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신문들은 그를 "3류 서부 변호사" 그리고 좋은 문법을 모르는 "4류 강연자"로 서술했다. 그는 행정적 경험이 전무했으며 겨우 1년도 안 되는 정규교육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화당 대통령후보 지명을 위한 그의 주요 경쟁자 3인은 공화당원들에게는 아주 친숙했다. 윌리엄 헨리 스워드(William Henry Seward)는 그가 워싱턴에 가기 전에 그는 이미 10년 이상 뉴욕주의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뉴욕의 주지사를 두 번이나 역임했다. 오하이오주 출신의 사먼 체이스(Salmon P. Chase) 역시 상원의원과 주지사를 역임했으며 공화당의 창당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 에드워드 베이츠(Edward Bates)는 미주리주 출신의 널리 존경받는 원로 정치가였다. 자신들이 링컨보다 교육을 더 많이 받았으며, 보다 경험이 많고, 그래서 링컨보다는 더 자격을 갖추었다고 알고 있던 이 3인은 링컨이 공화당의 지명을 획득하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자 모두가 경악했다.

그런데, 링컨은 이 3인의 경쟁자들을 모두 자신의 내각에 입각시킴으로써 정계를 더욱 경악시켰다. 그것은 위험스러운 조치로 보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음 선거에서 잠재적 경쟁자들을 높여주고 또 그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단지 명목상의 대통령으로 보일 것을 확실했기 때문이다. 링컨의 반대자들은 링컨이 리더십의 첫 시험에서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내각의 구성은 그만큼 중요했다. 링컨의 이 첫 결정은 거대한 용기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덜 자신 있는 사람은 자신의 권위에 의문을 결코 제기하지 않을 개인적 지지자들로 자신을 둘러쌀 것이다. 후에 링컨은 '왜 자신의 내각을 위해 자신의 주된 경쟁자들을 선택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답변은 간단하고 기민했다. "우리는 내각에 당의 가장 강력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나는 이들이 당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나는 국가를 위해 그들의 봉사를 박탈할 권리가 없다." 자기의 정적들을 자신의 내각에 임명하는 결정은 어쩌면 링컨의 감정적 힘의 가장 명백한 본보기였다.

링컨 대통령은 취임식이 끝난 직후부터 그가 서거할 때까지 전쟁을 수행했다. 그리고 링컨이 성공적으로 치른 미국의 내전은 단지 미국사(史)를 넘어 범(凡)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우선 미국사에서 의미를 본다면 첫째로, 그것은 민주공화국으로서 단일 연방국가의 존립에 치명적인 반란세력에 대한 기존 연방정부의 승리였다. 18세기 미국의 탄생이 전쟁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처럼, 19세기 당시 미국의 남북 간 대결도 오직 무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아주 심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인들의 삶의 양식에 관한 근본적인 투쟁, 즉 실존적 투쟁이었고 일종의 신들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남북전쟁 중 링컨이 뚜렷하게 보여주었듯이 내전의 종결양식은 반드시 '무조건 항복'이어야만 했다. 타협이나 절충을 통한 내전의 종결은 반란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 결과 링컨의 승리는 미국을 하나의 민족국가, 혹은 진정으로 통일된 국민국가의 완성이었다.

19세기는 민족통일국가의 건설 시대였다. 이탈리아에서 카브르와 독일에선 비스마르크가 통일 민족국가를 수립했다. 그러나 링컨은 더 큰 일을 해냈다. 그는 단지 통일국가를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특별한 통일국가, 즉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헌신하는 통일국가를 수립했던 것이다. 만일 남북전쟁에서 남부의 반란세력이 승리했다면 지상의 민주공화국의 마지막 희망이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링컨의 불멸의 표현을 빌려 말한다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둘째로, 남북전쟁은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에 이은 '제2의 미국혁명'으로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다. 당시에 많은 미국인들처럼 링컨 대통령도 역시 미국독립선언서의 약속들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노예제도를 먼저 폐지해야만 한다는 것을 오직 점진적으로만 깨달았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링컨은, 노예제도의 보호자로서의 헌법과 자유의 주된 보장서인 독립선언서 둘 사이의 차이를 해소해 나가는 조치를 취했다. 남북 양자 모두가 미국독립혁명의 정당한 후예라고 자처했다. 결국 노예제도가 분쟁의 핵심이었다. 마침내 1861년 링컨 대통령의 리더십하에 미국의 국민들은 노예제도 페지론자들이 주장하는 '보다 높은 도덕률'과 노예소유주들이 토로하는 '법률주의'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야기된 내전을 감당하고자 일어섰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미국의 급진적 공화당원들뿐만 아니라 대서양 건너 유럽의 급진주의자들도 그것을 혁명으로 간주했다. 당시 런던에 있던 카를 마르크스는 자신의 동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노예 과두정'에 대항하는 미 연방정부의 전쟁을 만일 북쪽이 기회를 잡아 노예제도의 폐지를 선포한다면 잠재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혁명운동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링컨이 실재로 그렇게 했을 때 마르크스는 "400만명의 노예해방과 같은 거대한 변환이 그렇게 빨리 이루어진 적은 결코 없었다"고 환호했다.

셋째로, 남북전쟁에 의한 미국의 통일은 미 대륙에 거대한 단일 대륙국가, 혹은 일종의 제국을 탄생시켰다. 버나드 드보토(Benard DeVoto)에 따르면 남북전쟁은 '어제' 대 '내일'에 관한 것이었다. 어제는 노예제도와 목화라는 하나의 작물 위에 건설된 농장을 가진 남부였고 내일은 공업화된 북부와 그곳의 반노예제도였다. 링컨에게 미 대륙은 분할되어서는 안 되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었다. 지리가 반드시 인간의 인격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리는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링컨은 대평원을 바라보면서 전 지구를 직관했던 것이다. 남북전쟁은, 특히 남부가 승리했다면 각 주들이 궁극적으로 주의 경계선을 따라 사분오열될 위험성, 바꾸어 말해서 여러 개의 독립국가들로 분열되는 소위 '발칸화(Balkanization)' 할 수 있는 위험성을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렇게 분열된 미국이 여러 주권국가들로 확산되어 그들 상호간 자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고 심지어 전쟁을 불사한다면 미국 역시 30년 전쟁을 겪은 17세기의 유럽이나 중국의 옛 전국시대와 같은 '전쟁상태' 혹은 '천하대란' 속으로 전락하여 오랫동안 거듭되는 전쟁을 겪었을 것이다. 인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럴 개연성은 아주 명백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미 대륙이 발칸화되지 않고 오히려 '비잔틴화(Byzantinization)'되는 방향으로 실재 역사가 전개된 것은 전적으로 링컨의 리더십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북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링컨은 미 대륙에서 일종의 '천하통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넷째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링컨은 아주 상식적으로, 따라서 그만큼 진부한 말이긴 해도,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정치지도자가 지니는 탁월한 리더십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일깨워 주었다. 상이한 지도자는 상이한 결과를 초래한다. 지도자는 역사창조의 기회를 갖지만 모든 지도자가 다 위대한 역사의 창조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링컨 대통령은 전쟁을 수행하고 승리함으로써 미합중국을 구했다. 그러나 링컨의 처음 조치는 우선 전쟁을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의 전임자인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대통령은 각 주들이 연방정부에서 이탈할 권리가 없다고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사학은 개별 주들의 이탈은 헌법상 불법이지만 본인이 그것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표명은 오히려 남부의 이탈을 고무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었다. 그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은 사실상 많은 일을 한 셈이다. 왜냐하면 뷰캐넌 대통령은 남부의 미래 연합국가들로 하여금 전쟁을 조직하고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헌법을 '수호하고 보호하고 방어한다'는 대통령의 취임선서를 했으며 또한 그런 목적을 위한 군 총사령관의 권한을 헌법에 의해 부여받았지만 그는 선서를 지키지 않았으며 그 권한을 적합하게 사용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링컨은 달랐다. 그는 정치적 분별력과 함께 대범한 행동을 위한 용기를 갖춘 지도자였다. 그는 연방정부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때가 도래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렇지만 그는 노예제도의 확대문제에 대해 어떤 타협도 없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는 남부 측의 선제공격이 있자 즉시 단호한 방어적 전쟁을 택했다. 그것은 그의 전임 대통령 뷰캐넌에겐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범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링컨과 뷰캐넌은 그렇게 서로가 판이하게 다른 정치 지도자였던 것이다. (계속)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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