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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73주년 기념 특집연재] ‘외숙모’ (上)

[한국전쟁 73주년 기념 특집연재] ‘외숙모’ (上)

기사승인 2023. 06. 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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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화 단편소설
외숙모 삽화
삽화= 장봉군 화백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홍상화 작가의 단편소설 '외숙모' 전문을 3회(中 14일자·下 15일자)에 걸쳐 게재합니다. 분단의 질곡이 지속하는 상황에서 문학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삶을 깊게 들여다보자는 취지입니다. '외숙모'는 젊은 나이에 결혼해 부부의 정을 느끼기도 전에 남북으로 헤어져 소식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이산부부의 삶을 그린 작품입니다. 전쟁의 이면을 다층적으로 되돌아보고 분단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는, 희망을 느끼게 하는 귀한 분단문학 작품입니다. <편집자 주>

외숙모 上

1

일요일 아침, 나는 집필실 유리벽을 통해 들어오는 초겨울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시끌벅적한 여의도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설 때 오늘만은 뭔가 쓸 수 있기를 기대했었다. 집필실이 있는 건물이 평일에도 글을 쓰지 못할 만큼 시끄럽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일요일은 무언가 여느 날과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집필실에 온 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으나 원고지는 텅 빈 채 그대로였다.
그때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집필실을 뒤흔들었다.
"여보세요."
"현 선상님 계십니껴?"
경상도 사투리가 짙게 묻어나는 중년 여인의 목소리였다.
"네, 전데요."
"지는예……."
그녀는 한참을 뜸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째 설명을 할꼬…… 저, 성백희라고 기억합니껴?"
성백희…… 성백희…… 내 외가가 성씨이고 백자 돌림이 내 외삼촌뻘이 된다는 것은 기억났으나 누군지는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요…… 누구신지요?"
"선상님 외삼촌이 성백희 씨 아닙니껴!"
그제서야 6·25전쟁 전 내가 아홉 살 때 본 외삼촌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네, 알겠어요……. 그런데 누구시지요?"
"지는예…… 지는…… 우예 설명을 해야 할지……."
"……."
"성백희 씨가 제 남편이었십니더."
"네?"
나는 깜짝 놀라 하마터면 송수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외숙모님이시군요."
"예……."
"지금 어디 계세요?"
"여기 한강 유람선 여의도 선착장입니더. 대구에서 친구들하고 환갑 나들이 서울 관광을 와서예."
"괜찮으시다면, 제가 지금 그리로 갈까요?"
"지금 말고예. 유람선이 곧 떠난다 카이 돌아와서 보믄 안 되겠십니껴?"
"그렇게 하지요."
"12시에 여의도 선착장에서 기다리겠십니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서도 그 갑작스러움 때문에 한참 동안 멍하니 흰 벽만 응시했다.
나의 기억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외숙모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겨 비녀를 찌르고 옥색이나 노란 저고리에 붉은색이나 파란색의 옷고름을 맨, 스무 살 시절의 외숙모는 전형적인 한국 여성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외숙모와 40여 년 동안 연락이 끊겼던 것에는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외삼촌은 늙으신 부모님의 권유에 따라 6·25전쟁이 터지기 전 겨울에 고향 능바우에서 혼인을 치렀다. 신부는 능바우에서 70리쯤 떨어진 점촌 양가 출신의 규수였다. 외삼촌은 능바우에서 신혼생활을 2주일도 못하고서 학교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 후 6·25전쟁이 터져 서울이 함락되자 인민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끌려간 외삼촌은 생사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 처지에 놓였다.
반면 외숙모는 남편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시부모님을 모시고 독수공방을 지켜온 것으로 안다. 그런 외숙모가 1953년 여름에 시가 누구한테도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옷가지를 싸가지고 집을 나갔는데, 그 사실을 나는 1952년 능바우를 떠난 지 3년여 후 우연히 들었다. 그리고 외삼촌이 아마도 북한으로 끌려간 것 같다고, 외삼촌을 마지막으로 목격한 동료 의용군이 외가에 소식을 전해주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 후 외삼촌에 대한 어떤 소식도 들을 수 없었고, 외가 식구들은 외삼촌이 북한에서나마 살아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여의도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창 쪽으로 갔다. 따스한 햇살 아래 광장에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아이들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나의 눈은 어느새 초등학교 3, 4학년 정도 된 아이들의 모습을 찾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그들의 노는 모습에 붙박여 떠날 줄 몰랐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능바우 들판이 눈앞에 그려졌다. 잘린 벼포기가 듬성듬성 보이는 얼음판 위에서 썰매를 타던 열 살 때의 내 모습이 되살아났다. 6·25전쟁이 난 후 처음 맞았던 혹독한 겨울 어느 날, 경상북도 상주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능바우,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백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었다.
내가 능바우에 대해 가슴속에 특별한 느낌을 품고 있는 이유는 1·4후퇴 직후부터 1년 반 동안 가족과 떨어져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 후 학창시절 방학 때면, 특히 겨울방학 때면 자주 능바우에 갔다. 겨울방학은 내 유년 시절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대구·서울·부산, 그리고 외국 등의 도시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외가가 있는 능바우가 유일한 내 마음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쩌면 인생의 대부분을 시골에서 보낸 어느 누구보다도 능바우에 대한 나의 애정은 더 깊을 것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성년이 되기 전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있었던 유일한 경험이었다든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였던 나의 뇌리 속에 깊게 파고든 시골의 정경과 인정 때문이었다든지, 오랫동안 시끌벅적한 도시생활을 하다 보니 나이가 들면서 점차 도시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든지, 여하튼 1년 반 동안 지낸 능바우에서의 생활은 내게 특별했다. 내 소설 여러 곳에서 배경 무대로 등장할 만큼 능바우는 내 정신세계의 원형이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책상으로 다가가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작가 노트를 꺼내 아직도 소설화하지 못한, 나의 능바우 생활이 묘사된 한 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2

……열 살 난 소년에게도 1·4후퇴는 찾아왔다. 집안 어른들의 의견에 따라 동생은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나고, 소년은 부모와 떨어져 외가로 보내졌다. 자손을 하나라도 남기려면 두 형제를 따로 떼어놓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지론 때문이었다.
소년은 남편과 사별해 일찍이 혼자가 된 이모를 따라 외가가 있는 경북 상주의 능바우로 가게 되었다. 소년은 한강을 건너와 영등포역에서 곳간차에 탄 이모와 떨어져 열차 지붕 위에 앉아 갈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소란스럽고 몽롱한 가운데 잠이 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자다가 눈을 뜨면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광활한 암흑 속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럴 때면 소년은 달리는 곳간차 지붕 위에서 뛰어내려 그대로 걸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컴컴한 들판에 발을 내디뎌보려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달리는 곳간차 지붕에서 암흑 속 들판으로 뛰어내리지 않은 소년은 김천역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곳에서 곳간차 안에 탔던 이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러고도 한참 시달린 끝에 김천에서 꽤 먼 상주에 내렸다. 그곳에서 트럭으로 20리나 북쪽으로 달려가 성씨들이 모여 사는 능바우로 가게 되었다.
마침내 외가에 도착했지만, 모든 게 낯설었다. 외할머니와 이모가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사이 소년은 싸리문을 나섰다. 초가들이 모여 있는 중간쯤에 텃밭이 있고, 그 밭 주위로는 엉성하게 돌로 쌓아 올린 담장이 있었다. 듬성듬성 쌓아 올린 돌담장은 그 동네의 다른 집 울타리와 같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그런 담장들을 보자 갑자기 그것을 허물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래서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두 손으로 힘껏 돌담장을 밀어젖혔다. 장난감처럼 무너지는 우스꽝스런 담장 안에 사는 이 마을 사람들은 역시 미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우쭐해졌다.
그래서 소년은 동네 아이들을 마음씨만 고운 어수룩한 미개인쯤으로 취급했다. 그러나 얼마 후, 소년이 서울을 떠날 때 어머니가 준 세 벌의 옷 중 한 벌이 더 이상 입지 못할 정도로 해지자 소년도 동네 아이들 축에 끼이게 되었다. 소년을 다소 어렵게 생각하던 동네 아이들도 소년에게 싸움을 걸어왔다. 때로는 얻어맞기도 했지만, 대개는 권투 흉내를 내어 동네 아이들에게 겁을 주었다. 바지저고리 시골뜨기 서너 놈의 코피를 터뜨리고 나자 소년은 싸움깨나 하는 서울내기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그런대로 두어 달이 지났다. 어느 날 면사무소에서 피난민 학생에게 혜택을 준다는 연락이 왔다. 소년이 면 소재 학교에 가보니, 면사무소 직원은 갱지 공책을 주며 교과서를 베껴서 공부하라고 했다. 소년은 교과서는 없더라도 그까짓 바지저고리 놈들한테 뒤질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공부와 씨름했다.
예상했던 대로 나이 많은 바지저고리 촌놈들과 비교해 서울놈이 나은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3학년 반 아이들 중에 '의'자 발음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아이는 소년밖에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비슷하게나마 발음했으나 얼마 후에는 선생님도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깨달았는지 '의'자가 나오면 소년에게 발음을 시켰다. 어깨가 으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면 소재 학교에서 피난민 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한 글자, 즉 '의'자 발음이 소년에게 자부심을 불어넣어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가 미군 담요로 만들어준 소년의 옷들이 검은색 솜바지와 솜저고리로 바뀌었다. 그 무렵 희한한 변화가 생겼다. 인민군이 퇴각할 때 그들을 따라간 부모들 집안의 아이들이 패거리를 지어(사실 능바우 대부분의 집안이 그런 처지였다) 소년을 그들의 가상의 적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희멀건 얼굴의 서울 소년이야말로 적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 일로 소년은 얼마간 외톨이로서 냇가에서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그때서야 소년은 처음으로 부모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처음 맛본 시골생활에 매혹되었고, 동네 아이들도 서울 손님으로서 특별히 대해주었기 때문에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그리 크지 않았었다.
어느 날 소년은 우연히 동네 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와의 소식이 끊겨 자신이 이제 고아가 된 것을 알았다. 그때부터 소년의 눈에 모든 사물이 새로운 형태로 비치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고기들의 서식처로만 여겨왔던 동네 앞 시내가 몹시 처량하게 보였다. 밤길을 밝혀주는 고마운 존재로 알았던 둥근 달이 그때부터 슬픈 빛을 띠기 시작했다. 따스한 구들 위에서 지내면 되었던 한겨울이 살을 에는 매서운 들바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을 버릇없는 놈으로 보던 동네 어른들의 눈이 갑자기 다정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살아서 아들을 데리러 온 것이다. 문간에 모여선 동네 어른들 사이를 지나 집에 들어갔을 때 동네 아낙네들이 특히나 다정스럽게 굴었다. 한 아낙네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버지가 와 계시니 사랑방으로 가보라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년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오히려 적개심이 일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낙네가 시키는 대로 사랑방으로 가보았다. 열린 사랑방 문틈으로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멋진 양복을 입고 까만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빗어 넘긴 아버지가 보였다. 비록 헤어진 지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능바우를 떠났다.

내가 열 살 적 1·4후퇴 때 능바우 외가로 가게 된 사연과 그곳에서 보낸 1년 반 동안의 삶이 묘사된 부분을 읽고 나자 내 눈가가 조금 젖어들었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으로 다가갔다. 수년 전 분단을 주제로 쓴 장편소설을 꺼내 들고 뒷부분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외숙모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부분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성의식의 미망인 소식은 가슴 아픈 것이었다. 성의식의 부인은 신접살림 몇 달 만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남편 대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평생을 청상으로 지낼 각오를 했다.
그녀는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혼자 달랑 외가로 피난 와 고아가 된 큰시누이의 열 살 된 아들과 평생을 지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낮에는 들일을 나가 그 아이에게서 국군과 인민군의 군가를 배웠고, 밤에는 등잔불 밑에서 아이에게 유행가를 가르치며 함께 소리 죽여 불렀다. 갈수록 정이 더해지던 어느 날, 죽은 줄 알았던 아이의 아버지가 나타나 아이를 데려갔다. 그날 밤 유난히 휑뎅그렁해진 방에 앉아 있으려니 온통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외로움이 몰려왔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집을 뛰쳐나왔다. 지나가는 버스를 무작정 세워 올라탔다.
운전기사가 종점이라고 하는 곳에 내리기는 했지만 밤길이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운전기사가 안내하는 여인숙에 들었다. 바로 그때의 운전기사가 지금의 남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새 남편은 밤낮없는 술주정에 걸핏하면 살림을 부수고, 심지어는 손찌검까지 하는 남자였다. 그럭저럭 30년 가까이 참으며 딸 하나와 그 아래로 두 아들을 두었다. 미망인은 몇 년 전 공장에 취직을 하겠다고 서울로 간 딸이 언제부턴가 짙게 화장한 얼굴로 고향을 찾아오고, 시집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다고 걱정했다.

이 부분에 등장한 성의식은 바로 나의 외삼촌이 모델이고, '혼자 달랑 외가로 피난 와 고아가 된 큰시누이의 열 살 된 아들'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인용문에는 성의식의 부인, 즉 조금 전 전화를 걸어온 외숙모의 인생을 재혼하여 불행하게 된 일생으로 그렸는데, 내가 그렇게 픽션화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막연히 행복한 인생을 살았을 것 같지 않았으며, 또한 분단의 아픔을 주제로 한 소설이었으므로 민족상잔이 망가뜨린 또 하나의 삶을 언급하고 싶었던 것 같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내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능바우를 떠남으로써 외숙모가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다고 표현한 점이다. 내가 그곳을 떠나고 3년 후에 우연히 외숙모의 가출을 알게 되었지만, 왜 그렇게 추측했는지 지금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 나와 외숙모가 함께한 생활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건 대부분 사실 그대로였다. 낮에 둘이서 들판에 나가면 내가 외숙모에게 국군가와 인민군가를 가르쳐주었고, 밤에는 신방으로 차린 골방에 앉아 등잔불 밑에서 외숙모가 나에게 유행가를 가르쳐주었다. 스무 살 새색시와 열 살 소년이 그 어떤 애틋함 속에서 1년 반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낸 것이다. 그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평생 잊지 못할 만큼 각별한 기억으로 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사본 -홍상화 작가 사진1
홍상화 작가/ 한국문학사 제공
▶ 홍상화 작가는 1940년 대구에서 출생해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거쳐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장편소설 '피와 불'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해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장편소설 '정보원' '거품시대'(전 5권) '사람의 멍에' '범섬 앞바다' '디스토피아' '30-50 클럽', 소설집 '내 우울한 젊음의 기억' 등이 있다. '거품시대'는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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