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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일제가 군대를 동원하고 고종을 협박해 강압적으로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자, 이에 통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이들의 자결 순국은 일제의 불의에 항거해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써 조국 독립의 불씨가 됐다.
홍만식 선생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며 갑신정변의 주역인 홍영식의 친형으로 갑신정변 이후 20여 년간 여주의 산골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다, 을사늑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라며 의관을 차려입고 부친의 묘소에 사별 인사를 드리고 독약을 삼켜 순국했다.
선생의 순국은 언론과 민간의 주목을 크게 받지 못했지만, 고관을 지낸 인사의 순국으로서 가장 빨랐다. 당시 ‘매천야록’에는 “홍만식이 순국하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더욱 훌륭하게 여기며 슬퍼했다”라고 기록됐다.
고종은 장례비용을 궁내부에서 넉넉하게 보내주도록 하고, 특별히 종1품 의정부 참정대신의 직함을 추증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상철 선생은 1904년에 학무행정을 담당했던 학부 주사로 임용되고 시사(時事)에 대해 비분강개를 느끼고 있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분통함에 밤늦게까지 통곡을 그치지 않았고, 민영환 선생 등의 자결 소식이 들려오자 뒤를 이어 약을 먹고 30세의 나이로 자결 순국했다.
고종은 “학부 주사 이상철이 충의와 울분이 격발하여 강개한 심정에 목숨을 끊었다”며 선생의 순국을 애도했다. 이어 선생의 뜻이 가엽고 절개가 가상하니 관(棺) 제작용 목재를 내려주고, 특별히 학부 협판(協辦)에 추증토록 조서를 내렸다.
김봉학 선생은 평양에 있는 군대에 입대해 평양진위대에서 근무하다가 서울로 상경하여 징상대(徵上隊) 상등병으로 복무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군인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고 동지들과 모의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일이 누설되었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자결 순국했다.
고종은 선생이 나라를 위한 근심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바쳐 절개를 세웠음을 기특하게 여겼고, 선생을 법부 참서관에 추증하고 공덕을 기리는 정문(旌門)을 세워주는 조령을 내렸다.
선생의 자결 순국에 ‘대한매일신보’는 “선생이 순국해 국민들에게 충의를 알리고 군대에 모범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1906년 선생의 유해를 실은 운구가 평양에 도착했을 때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 운구를 맞았으며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건석 선생은 1880년부터 1905년까지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한 소청(疏廳)을 여러 차례 열어 반개화(反開化)·반일(反日)의 국권수호운동을 벌였다.
을사늑약 이전인 1905년 10월경에도 선생은 경운궁 대안문 앞에 엎드려 “일본과 조약을 체결해서는 안된다”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고종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선생은 일본군사령부에 체포된 후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포기하면 석방시켜 주겠다”라는 회유성 제안을 거절해 6개월이나 죄목 없이 감금됐다.
유생들이 연명으로 석방을 탄원했으나, 끝내 출옥하지 못하고 옥중에서 피틀 토하고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홍만식 선생, 이상철 선생과 김봉학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건석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결기를 보여준 선생들의 자결 순국은 우리 민족의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 투쟁의 불씨가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