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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0편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조부인 김일성 주석을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이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백두혈통의 정통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 백두혈통 이야기의 중심에 김일성이 있고, 그 핵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로 대표되는 반제투쟁이다.
백두혈통의 투쟁사는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김정은의 6대조이자 김일성의 증조부인 김응우(金膺禹, 1845년 4월 8일 ~ 1878년 10월 4일)가 나온다. 김일성은 증조부 김응우를 최초로 ‘반제애국투사’로 날조했다. 그 계기가 되는 사건이 1866년 7월에 평양의 대동강에서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현재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예외 없이 방문해야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만경대의 김일성 생가와 평양 시내의 제일 높은 언덕인 만수대 꼭대기에 있는 조선혁명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1972년에 김일성 주석의 60세 회갑을 경축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 박물관 속에는 김일성과 그 일가의 혁명역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는 각종 전시물이 진열돼 있다. 북한 주민뿐 아니라 평양을 방문하는 모든 외국 사람들은 만경대와 조선혁명박물관으로 안내된다. 이곳에서 김일성과 그 일가의 장황한 혁명역사를 보고 들어야만 한다.
5만여 평방 미터의 이 박물관에 들어서면 90여 전시실의 첫 번째 방에 벽면 가득 한 폭의 유화가 걸려 있다. 바로 1866년 평양의 대동강으로 침투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김일성 주석의 증조부인 김응우가 물리치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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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 이어서 1894년 동학농민봉기의 그림, 1907~9년의 항일의병투쟁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런 투쟁들은 모두 김응우의 애국적 투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느낌을 교묘하게 조장하고 있다.
◇셔먼호 격침 주도 민간인, 김응우 아닌 박춘권
그러나 김응우의 애국적 투쟁은 김일성의 항일투쟁사가 그렇듯 새빨간 날조의 역사다. 역사의 기록에는 셔먼호 사건은 평안감사 박규수(朴珪壽)가 철산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과 함께 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 이 사건에서 셔먼호를 불로 공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민간인은 퇴역 장교 박춘권(朴春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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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측이 주장하는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의 지도자설은 적어도 조선조 역사의 기록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더욱이 김응우에 대한 기록은 북한의 역사책에서도 자꾸 바뀌어 이것이 날조된 역사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북한도 1968년 이전에는 ‘박춘권’ 주도 시인
북한이 애초 김응우를 셔먼호 사건에 처음 등장시킨 것은 1968년 부터다. 그전에 책들에서는 북한 당국도 셔먼호 사건의 결정적 공로자는 박춘권이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68년부터 나온 책부터 박춘권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에 김응우의 이름을 갖다 얹기 시작했다.
김정은 백두혈통과 김일성 집안의 거짓말 선전술을 분석해보면 2가지 원칙이 있다. 하나는 거짓말을 만들어 낼 때 아주 엉뚱한 큰 거짓말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설마 그런 큰 거짓말이야 있을 수 있겠느냐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그 거짓말을 반복 선전하는 것이다. 거짓말도 백번 하면 참말이 된다는 현상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어두운 외국 사람들은 이런 북한의 선전에 대부분 속아 넘어가게 된다. 얼마전 종북 토크쇼를 벌이다 추방당한 재미동포 신은미씨도 북한당국의 안내에 따라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했다는 기록을 ‘오마이 뉴스’에 연재한 방북기에서 전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도 반복되는 집중적 교육과 선전으로 이 날조된 역사를 진짜 역사인 줄로 믿고 있다.
북한은 또 이 셔먼호가 미국 배였다는 사실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셔먼호는 미국이 계획적으로 보낸 배는 아니었다. 탐욕과 모험심에 가득 찬 미국 상인의 배였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1866년 여름에 일어났다. 이 배의 주인은 중국 텐진(天津)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인 상인 프레스톤이고 선장은 덴마크 사람 페이지였다. 배의 선원장은 미국인 윌슨이고 그 밑에 18명의 선원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중국 사람 아니면 말레이시아 사람들이었다.
이 배는 우리나라에 금과 홍삼, 호랑이가죽이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서양의 유리그릇, 천리경 등 잡화와 바꾸어 볼 생각으로 조선으로 향해 그 해 7월 1일 중국의 산동을 출발했다. 조선 해안에 도착했을 때, 우리 관리가 나서 우리나라는 국법으로 외국과 교역이 금지돼 있다며 물러가라고 통보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근처까지 침입해 왔다.
이 와중에 충돌이 일어나고 셔먼호는 부근을 왕래하던 우리 배를 약탈하고 살상자 12명을 내는 등 만행을 저지르자 결국 평양 사람들에 의해 불타게 된다.
그런데도 북한은 이 배가 마치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정책의 선봉으로 왔던 배인 것같이 사실을 일부러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배와의 싸움에 섰다는 김응우의 역할을 미제의 침략에 대한 우리의 첫 번째 반제투쟁이었다는 식으로 날조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할 때 대체로 1860년대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를 근대사라고 한다. 1860년대가 근대사의 기점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사람들은 우리나라에 통상을 하자고 빈번하게 요구해왔다.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양을 거쳐 동진하며 북상했다. 미국은 태평양을 건너 서쪽으로 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거쳐 남하하면서 모두 이 무렵 우리나라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로 오기 전에 중국으로 먼저 침투했는데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거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 소식은 우리나라에 전해져 우리는 몹시 긴장하고 서양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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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에 들어가면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미국함대의 침공이 있었고 또 일본의 강압에 따른 개국이 있었다. 이어서 1880년대에 들어가면 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 나라와의 외교관계가 성립되고 특히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각축전이 벌어지다가 1910년에 이르러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역사로 이어진다.
우리의 근대사를 이렇게 잡을 때 이 근대사는 ‘외세의 침입’과 ‘주권의 상실’이라는 하나의 흐름과 ‘주권의 상실’이라는 시대적 특징을 갖게 된다. 때문에 이 시대 한민족의 대응은 나라를 지키기 위한 투쟁과 주권 회복을 위한 투쟁으로 일관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권을 강탈한 일제와 싸워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려고 투쟁한 수 많은 애국투사들의 역사를 정중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한민족의 근대사인데도 북한의 근대사는 이런 애국투사들의 기록이 없다. 북한의 근대사에 등장하는 애국투사는 모두 김일성 주석의 집안 사람들이다.
북한의 근대사는 있었던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을 교묘하게 변조해 놓고 그 위에 그 사건의 주인공으로 김일성 본인 및 집안 사람들을 덧칠하고 있다. 또는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놓고 그 주인공으로 자신이나 집안 사람들을 갖다 놓고 있다. 본지가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에서 시리즈에서 밝히고 있듯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가 모두 이런 식이다. 이것이 북한의 근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