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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나오라는데 난 한 번도 안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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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진 기자

승인 : 2014. 11. 13. 06:05

추자도 예초리에서 만난 황경한의 6대손 황인수씨
황인수
황사영백서사건의 당사자인 황사영의 아들인 황경한의 6대손 인수씨가 파안대소하고 있다.
“천주교에서 오셨어요.”

첫 모습이 너무도 순박해보이는 황인수씨(68)가 기자에게 이렇게 묻고는 “어 오기로 했는데...”하며 웃었다.

이제 막 바다에서 톳을 채취하고 부인과 함께 나오는 길인 황경한의 6대손 인수씨를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만났다.

천주교인이 아니라면 황경한은 뭐고 황인수는 뭐냐며 궁금해 할 것 같아 부연 설명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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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역죄인의 아들로 외딴섬 추자도에서 평생을 숨어 산 황경한의 묘.
황경한은 19세기에 추자도에 살던 한 어부다.

무슨 연유에선지 올레길 18-1코스 하추자도에 그의 묘가 성지처럼 꾸며져 있다.

그의 묘비(墓碑)엔 ‘순교자 황사영 신앙의 증인 정난주의 아들 황경한의 묘’라고 쓰여 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 때 제천 배론 산중으로 피신해 토굴 속에서 ‘백서’를 작성했다. 여기에는 베이징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밀서가 발각돼 사형에 처해지고 천주교 박해도 한층 가혹해졌다.

황사영 (1775∼1801) 백서 사건의 당사자인 황사영의 아들이 바로 황경한이다. 그 아들이 어쩌다 이곳에 묻혔을까. 남편 황사영이 서울에서 처형된 후 그의 아내 정난주는 두 살 아들 경한을 안고 제주로 유배를 가다 배가 추자도를 지날 때 섬 동쪽 갯바위에 아기를 내려놓고 떠났다. 아들만큼은 죄인으로 키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정난주는 제주 대정에서 관노로 38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그러나 아기는 어미의 바람대로 예초리 어부 오씨가 거둬 제 자식처럼 키웠다. 경한이 성년이 되자 오씨는 꼭꼭 숨겨뒀던 내력을 들려줬다. 그가 입고 있던 윗 옷깃에 깨알 같은 글씨로 내력을 써놓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모자는 평생 재회하지 못했고 편지만 오갔다. 뒤늦게라도 화를 입을까 염려한 때문이란다.

그의 묘역 옆에는 ‘황경한의 눈물’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하늘이 탄복해 내린 선물이어서 사철 마를 날이 없다고 한다.

사본 -제주 (133)
아기 황경한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바닷가. 그의 묘에서 내려다 보인다. 산길을 넘으면 아기가 있던 바위도 나온다.
사본 -제주 (125)
정난주가 아기 황경한을 끼워뒀다는 바위. 풍광이 예사롭지 않다.
황경한의 6대손인 인수씨는 외동아들로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부인과 함께 아들 딸 하나씩에 손주를 둘 뒀다.

바로 교회 밑에 집이 있어 천주교 잘 다니냐고 물었더니 “나이 들어 나는 안다녀”하면서 “교회에서도 나오라고 하는데 한 번도 안 갔어”하고는 또 웃었다.

젊었을 때는 조깃배를 따라 다니며 돈을 많이 벌었다는 그는 “애들 집사주고 학교 보내고 집고치고 하는데 다 썼다”고 했다.

그의 집은 대부분의 섬 집 모양 그대로 단촐했다.

선조인 황경한의 묘에는 자주 가냐고 물었더니 “자주 안가”하면서 “벌초도 천주교에서 다 해줘 우리도 못한다”고 했다.

사실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아 오랫동안 인터뷰를 하고 싶었지만 그가 손을 내저어 그냥 끝낼 수밖에 없었다.

사본 -제주 (127)
황경한 묘소 앞을 지나는 올레길은 신대산전망대로 향한다.
황사영의 아들과 관련해 잘 아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면사무소에 요청했더니 추자도 특보를 지낸 이태재씨를 소개했다.

이씨에 따르면 황경한의 스토리는 기적이라고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예초리 오씨 부부가 소에게 풀을 먹이러 갔다가 울음소리를 듣고 알았고, 오씨 부인은 출산을 하지 않았는데도 빈 젖을 물렸더니 젖이 나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산 넘어 아기 울음소리를 도저히 들 수 없는 위치인데 그걸 들은 것과 빈 젖에서 젖이 나온 것은 두 번의 기적이 일어났기에 가능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추자도에선 황씨와 오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단다.

어머니인 정난주의 사망 소식은 두 달 후 편지를 받고 알게 됐고, 살아생전 모자지간 편지는 6번 오고갔다고 한다.

정난주는 관노인데도 제주목사가 제사를 모실만큼 기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몇 해 전 정난주의 묘가 커 합장묘라고 추정한 나머지 부장품 등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손을 대지 않았고, 또 애가 입고 있던 옷은 45년 전 화재로 불 타 지금은 볼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양승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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